서울 강동구 풍납동 토성 안에 백제 전기 500년의 역사가 잠들어 있었다. 백제의 왕도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을 지척에 두고도 우리는 1500년이 넘도록 그곳이 어딘지 몰라 역사의 수수께끼로 삼아왔다.국립문화재연구소는 최근 발간한 풍납토성 발굴보고서를 통해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 왕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결론을 내리고, 이 곳이 인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과 더불어 백제 전기 도성의 핵심지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론은 1997년 10월부터 실시된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 발굴조사와, 99년 인근 연립주택지에 대한 한신대 발굴조사의 결실이다.
유물에 대한 탄소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4~5세기 것임이 확인되었다. 대부(大夫)라는 관직 이름이 새겨진 토기편은 이곳이정부 고위관료의 주거지였음을 말해준다.
일반 주택에는 사용하지 못했던 기와편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 곳에 관청 종교시설 등 특수건물이 있었다는증거다.
■무엇보다 불탄 주거지 유물들이 역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3호 주거지에서는 건물 전체가 불에 탄 상태가 완전하게 드러났다.
기둥과 보와 서까래 목탄이 겹겹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 고구려군 내습으로 황망히 피난간 듯 집안에 인골은 없었고, 가구와 토기류 등이 어지러이널려 있다.
불탄 흔적으로 남았다. 개로왕 21년(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병사에 의해 도성이 초토화한 비극의 순간을 말해주는 유물들이다.
■이로써 잃어버렸던 백제 500년 역사가 우리 앞에 현실로 등장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건국기록에 관한 의심도 풀리게 되었다.
온조가 기원전18년 한반도 중부를 장악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부정한 일제 식민사관은 백제의 출발을 한강유역의 조그만 부족국가로 보았다.
그 축소사관의 영향으로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지금도 백제가 3세기 중엽에야 겨우 중앙집권적 국가 기틀을 잡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역사왜곡 수정도 급한 문제가 되었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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