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에 대한 미국 측의방미 요청을 둘러싸고 비판 기사와 기고문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기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비판기사의 필자인 이종석 선생은현 시기 북한 문제의 최고권위자인 만큼 우리가 누구의 지시나 압력에 따라 원칙적 입장을 바꿀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 선생은 우리의 미국방문의부당성의 근거로서 몇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우리의 방미는 국가 이익에 배치되며 둘째, 우리가 엄청난 고급한 대우를 받고 있는 만큼국가 공무원과 같은 자세로 정부의 의사에 무조건 순종할 의무가 있으며 셋째, 특수관리를 받고 있는 ‘망명자’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방미와 관련해 우리의 자유를구속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전체 국민의국가이지 일부 사람들만의 국가가 아니다. 이 선생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만이 국가의 이익을 대표할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한국에는 이선생과 국익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애국자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정부가 보장해주는 높은물질적 대우에 대해서는 언제나 감사히 생각하고 있으며 조국통일위업에 헌신하는 것으로써 반드시 보답해야 하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 선생이 정부의 대우문제를 우리의 원칙적 입장과 직접 결부시키는 데는경멸감과 혐오감을 금할 수 없다.
북한 노동당중앙위원회 비서의물질적 대우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사 그보다 더 높은 물질적 대우가 있다고 하여 그것과 자기의 가족, 그리고 한 생을바쳐 성취한 모든 소중한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마 비인간적인 정신의 소유자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생은 자신이 전 정권당국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투쟁한 민주투사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으며, 미국의 공화당 의원들이 필요한 외교적절차를 무시하고 우리를 초청하였다 하여 우리의 주권을 조롱하는 행위라고 애국적 울분을 토하였다.
자신을 청렴결백하고 투철한 애국심을 간직한 양심의화신으로 자처하고 있다. 우리는 묻고 싶다. 당신은 자기가 사랑하는 양심을 높은 물질적 대우와 바꾸겠는가라고! 자기의 양심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남의 양심도 존중하는 법이다.
이 선생은 미국에 망명한 장승길씨의실례까지 들면서 특수관리를 받는 망명객에게는 민주주의적 자유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즉 특수관리를 받고 있는 망명자에게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해 주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공인된 보편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체험을 통하여 우리의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참다운 수호자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김영삼 대통령 정권시기에 한번도 언론의자유와 활동의 자유에 대하여 호소한 적이 없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특수관리 대상이었다.
우리는 미국에 망명한 어떤작은 나라 사람이 아니다. 조국의 품에 안긴 한국인이다. 대국을 찾아가 생명의 안전을 구하는 망명객과 애국투사를 제대로 구별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개인의 인권보다 국익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인권문제가어떻게 한 개인의 문제로만 되겠는가. 국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인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이 독재의 논리가 아닌가.
우리가 특수관리를 받은 이유는오직 신변안전문제 때문이지 여기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될 것이다. 우리는 망명객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당당한 국민이다.
만일 우리를 초청한 미국의국회의원들이 필요한 외교절차를 지키는 데서 부족점을 발로시켰다면 그것은 외교경로를 통하여 바로잡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동맹국의 국회의원들의 호의를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것은 한미동맹관계와 관련된 원칙적 문제이다.
절차상의 부족점을 가지고 주권을 조롱하는 오만한 태도이니 뭐니 하며 큰일인 것처럼 떠드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민들 속에서 반미감정을 고취하려는 행동으로 밖에 평가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하고 남북문제해결에서 한미 양국의 공조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위하여 이용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커다란 영광으로 될 것이다.
이종석 선생의 공개편지 기사를통하여 한국 사회의 복잡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부족을 다시금 절실히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너무 늙어서 냉전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제는 이용가치가 없는 애물단지로 전환되었다고 비방하고 있다.
내가 늙은 것만은 사실이고 또 애물단지로 멸시당하고 있는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뼈대는 아직 남아있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세상에는절대적인 천재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대해 보려고 헛되이 많은 애를 썼지만 여기 남한에 와서는 천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골머리를앓고 있다. 그들이 풍기는 냄새 때문이다. 아마도 젖비린내인 것 같다.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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