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부양 얘기만 나오면 ‘선심’ ‘정치논리’논란이 벌어진다.부양은 곧 죄악이며, 긴축만이 정의로 여겨지는 것이 한국경제의 현실이다. 때문에 관료들은 ‘부양’이란말에 심한 기피증세를 보인다. 진념(陳稔) 경제부총리가 굳이 ‘경기조절’이란 표현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일종의 ‘부양 콤플렉스’다.
부양에 대한 죄의식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90년대 이후 가장 대표적인 경기부양책으론 6공때의 ‘4ㆍ4대책’과 문민정부 시절의 ‘신경제 100일 계획’가 꼽힌다. 물론 결과는 매우 비극적이었다.
90년 4월의 4ㆍ4 대책에는 통화공급확대 여신규제완화 등 정책수단도 포함됐지만, 핵심은 역시 ‘금융실명제 추진유보’였다.
흔들리는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6공 정부는 정치적으론 3당 합당, 경제적으론 ‘재벌 끌어안기’에나섰고, 결국 기업의욕 고취란 명분아래 실명제가 칼을 맞았던 것이다. 경기부양책으로서 4ㆍ4 대책은 반(反) 개혁조치였던 셈이다.
93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의 신경제 100일 계획은 공금리 인하와 설비자금 확대 등 ‘통화살포’를골자로 한 전형적 단기부양책이었다. 군사작전도 아닌 경제정책을 100일간 밀어붙이는 발상도 무모했지만, 만성적 고비용구조는 손대지 않은 채 경제에 기름(발권력)만 퍼부음으로써 ‘냄비경기’만고착되고 말았다.
하지만 과거의 부양책이 잘못됐다고 해서, 경기부양이 언제나 ‘유죄’인것은 아니다. 추락하는 경기, 얼어붙은 내수를 지켜만 보는 정부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부양책으로 친다면 반년새단기금리를 절반수준으로 끌어내리고, 포괄적 감세까지 동원한 미국처럼 확실하게 밀어붙이는 나라도 없다.
지혜롭고 독립적인 중앙은행, 금융기관의 엄정한 기업심사 기능, 혈세의 누수차단장치….
이런 전제조건이 하나씩 마련되고, 그래서 부실부문으로 돈이 흘러갈 통로가 차츰 좁아진다면, 경기부양과 구조조정은 양립할 수 있다. 극심한 경기침체로 조정할 구조조차 없어진다면 구조조정도 불가능한 것이다. 왜곡된 부양책은 막아야겠지만, 부양행위 자체마저 터부시할 까닭은 없다.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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