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몽양 여운형이 암살됐다. 향년61세.여운형은 20세기 한국 정치사를 통틀어 남과 북에서 동시에 존중을 받고 있는 드문 정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현우라는 테러리스트의 총탄이 초래한 그의 죽음은 음습했지만, 그의 사후의 행복은 찬란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분단 이후 몽양에 대한 평가가 남북 양쪽에서 같은 수준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북쪽에서야 민족 노선에 입각한 그의 좌우 합작 운동이 꽤 평가받을 소지가 있었지만, 반공주의가 정치권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깊숙이 뿌리내린 남쪽에서 몽양의 ‘용공’ 행적은 오래도록 백안시 돼왔다.
서울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자발적인 사회장으로 애도했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여운형이라는 이름은대놓고 비판하기에는 그 업적이 너무 뚜렷하되 선양하기 위해선 아주 많은 용기가 필요한, 그래서 아예 거론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그 침묵을 깨고 몽양을 일제 시대와 해방기의 탁월한 지도자로 부각시킨 것은 1979년 한길사에서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이었다. 그 뒤 시인 이기형씨가 실천문학사에서 낸 ‘몽양 여운형’(1984)을 거쳐 한울 출판사에서 나온 ‘몽양 여운형 전집’(1992~1994)에 이르러 이 거인의 모습은 남한 사람들에게 그 전모를 드러냈다.
신한청년당 당수, 쑨원ㆍ레닌ㆍ트로츠키와의 교유, 상하이 푸단대학 명예교수, ‘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회장,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당 총재, 근로인민당 창당 등 그의 연보를 채우고 있는 항목들은 화려하고 열정적이었던 어떤 삶의 편린을 드러낸다.
민족주의자로서의 몽양의 말. “조선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종합된 이익보다 더 크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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