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끝도 모를 싸움으로 날이 새고 진다. 대대적인 언론사 세무조사로 촉발된 ‘권(權)·언(言) 갈등’이 여야 정당간의 정(政)·정(政) 대결로 바화하더니, 전례없는 신문 대 신문·신문 대 방송간의 언(言)·언(言) 대립으로까지 확전되면서 나라 전체를 진흙탕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정부와 언론의 직접 이해당사자라고 여기는 대다수 국민들도 방관자로 있을 리는 만무한 터. 서로의 입장에 따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짜증스런 갈등이 벌써 몇 달 째 온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남·북문제나 노·사관계를 둘러 싼 ‘전통적 갈등’도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채 아슬아슬하게 내연하고 있고, 지난해 시민들의 혼을 온통 빼놓았던 의(醫)·정(政) 갈등도 최근들어 다시 발화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야말로 ‘무한(無限) 갈등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디에선가 한번 이견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전 국민이 가담하는 전면전으로 확산돼 끝없이 지속될 뿐, 나름대로 합리적인 접점을 찾아 산뜻하게 마무리되는 경우란 좀처럼 없다.
해결되지 않는 갈등은 내내 누적되면서 작은 계기에도 재차 발화, 온 나라를 수시로 뒤흔드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상당수 사회학자들은“요즘의 극단적 갈등과 분열상은 사회의 근저를 뒤흔드는 심각한 수준”이라며 현재가 ‘위기국면’임을 누누히 지적하고 있다. “해방 직후 혼란기의좌우익 대립이후 처음”이라는 견해마저 나오는 판국이다.
우리 사회의 원로격인 김용준(金容駿) 고려대 명예교수는 “모두들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는, 그것을 전부라고 주장하는 게 현재 우리사회 갈등의 근본 원인”이라며“다들 큰 시각으로 볼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적개심으로 갈갈이 찢긴 사회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술들을 돌리다 화제가 언론 세무조사 건으로 흐르면서부터 직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부하직원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기 시작합디다.
급기야 서로 출신지역까지 거론하면서 위계고 뭐고 없이 주먹다짐을 할 판이었어요. 보다 못해 나서서 ‘정부나 언론이나 다 문제있는 것 아니냐’며 대강 수습하려 했더니 양편 직원들 모두가 ‘사장님도 그렇게 어물쩡 넘어가려 하지말라’며 대들더군요.
전에는 그런 일이없던 터라 정말 낭패스러웠습니다.” 서울에서 직원 20명 남짓한 중소 수출업체를 운영하는 이모(52)씨의 토로다.
그는 “매달 두세번 정도씩 해오던 전체직원 회식을 아무래도 당분간 안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이라고 혀를 찼다.
사회가 온통 적과아군으로 갈리고 있다. 정부와 언론, 정당과 정당, 언론인과 언론인, 정치인과 문인, 정부와 지식인, 지식인과 지식인, 거기에 편갈린 시민들….
원래 특정 사회 현안에 대해 다양하게 입장이 갈려 논쟁이 벌어지는 현상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일. 그러나 작금의 모든 논쟁에는 정상적인 논리에 앞선 ‘독(毒) 오른 적개심’들이 가득하다.
‘한나라당 총재의 기관지’ ‘정권의 홍위병’ ‘가당치않은 X’ ‘극우세력’ ‘극좌동맹’ ‘비판언론 압살하
려는 권력의 살기(殺氣)’ ‘사주(社主)에 대한 굴종’ ‘매카시즘적 악몽’ ‘나치의 대국민 선전선동…’ 지난달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언론사 조사결과 발표이후 연일 도하 각 신문을 장식해온 가학성(加虐性) 언어들이다.출처는 이 나라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등의 입.
방송사 특집과 토론프로그램에서 쏟아지는 언어도 나을 것이 없다. 심지어 중앙일간지 출신의 한TV 토론자는 “기자들이 사주(社主) 앞에서 기립해 커피까지 타 준다”는 기막힌 현실왜곡까지 서슴지 않았다.
인터넷은 족히 거론할 것도 없다. 관련 사이트 게시판마다 온통 상대방에 대한 저주와 차마 지면에 인용할 수 조차 없는 욕설로 일관돼 있다.
■모든 이견은 결국 보·혁 갈등으로
우리 사회가 걸핏하면 극단적인 대결구도에 휘말려 드는 것은 모든 사회논쟁이 ‘보ㆍ혁갈등’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많다.
매 이슈마다 색깔론으로 덧칠되면서 사안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좌·우로 편가름이 이뤄짐으로써 토론과 타협의 여지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는 것이다.
최근 언론사 세무조사를 싸고 벌어지는 다자간(多者間) 공방도 크게 보면 결국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언론사 세금추징을 옹호하는 세력은 기성언론을 간단히 ‘수구세력’이라 비판하는 반면 그 반대측은 급진적 민중주의를 뜻하는 ‘페로니즘’이라는 말로 정부를 공격했다.
고려대 김우창(金禹昌ㆍ영문학) 교수는 “탈세 문제를 다룰 때는 세금추징이 정당하냐,않으냐가 사안의 본질”이라며 “일부 신문의 과거 친일, 민족반역 행위까지 거론하면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은 맹목적 도덕주의, 전체주의의 냄새가 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고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것은 참으로 가당치 않은 일”이라 추 의원을 비판하는 한편,이문열씨가 자신의 책을 반환하겠다는 독자를 상대로 ‘내 책을 봤다고 말하지 말라’고 대응한데 대해서는 “대가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못마땅해 했다.
연세대 유석춘(柳錫春ㆍ사회학) 교수도 같은 견해다. “보수와 혁신의 구분을 무시할수는 없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느냐는 것이죠.
때로는 좌가 옳을 수도 있고 때로는 우가 옳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생각과 존재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이들과 타협, 공존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사회가 현재 우리 사회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올해하반기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 실현과 이미 가시화한 통일헌법 논의 등을 포함, 정부의 대(對) 북한 접근방식을 둘러싼 논란은또다시 폭발적인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끝업이 내연하는 또 다른 갈등들
지난달 민주노총의 2차례에 걸친 총파업이 힘겹게 끝나 겨우 한숨을 돌린 상태지만, 노사 분규는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갈등의 단골 시한폭탄이다.
파업이 벌어질때마다 번번이 미봉에 그치는 바람에 노사갈등이 만성화하고 있다.
”조종사 노조와 회사가 충분한 대화도 없이 파업에 들어가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어요.
몇 번 만나지도 않고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발을 꽁꽁 묶는 항공사 파업이 시작되는지…”지난달 13일 ‘가까스로’ 타결된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의 파업을 줄곧 지켜본 대한항공의 미국인 기장 폴 길크리스트(49)의 말. 대화 빈곤이 빚어낸 고질적인 노사간 불신에 대한 지적이다.
탄탄한 경영으로 유명했던울산 유화공단내 T사와 계열사인 D사 공장. 노조원 1,800여명이 지난달 12일 회사측의 인원정리 방침에 맞서 파업을 시작한지 벌써 한달이 넘었고,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중인 고합 울산공장 노조도 “(노조와)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중국으로 설비를 이전하려는 회사측의 구조조정안은 노사공멸로가는 순서”라며 파업을 벌여 지난달 27일 공장이 멈췄다.
한번 노사갈등이 발생하면 매년 비슷한 이슈로 거의 어김없이 분규가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 노사문화다.
의약분업 시행을 둘러싸고 1년이상 계속되고있는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의·정 갈등은 지난 9일부터 전국의 동네의원들은 야간진료를 포기, 사실상 단축진료에 들어가면서 다시 악화하고있는 상태.
정부가 파탄 위기에 몰린 건강보험 재정안정화 대책의 하나로 시행한 통합 진찰료(진찰료+처방료) 고시에 반발한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측은 “정부가 의료법 개정안 철회 등 성의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내달부터 투쟁수위를 보다 높일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국민들로서는 지난해 3차례에 걸친 전대미문의 ‘의료대란’ 악몽을 또 다시 떠올려야 할 판이다. 건강연대 강창구(姜昌求) 정책실장은 “‘정부 발표→ 의료계 반발 및 투쟁→발표 재검토→…’ 등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악순환이 끝없이 이어질 조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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