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이끌 제도적틀 미비…전쟁.독재시대 '불신'남아우리 사회의 모든 대결과 갈등은 ‘사생결단’ 식으로 표출된다. 정치도 그렇고 노사관계,각종 이해단체의 대립도 그렇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극단적 대립은 늘 엄청난 사회적 충격과 비용의 손실을 동반한다.
그럼에도 불구, 갈등이 매번 파국으로 치닫는 이유로는 승자 독식의 사회구조, 짧은 민주주의 경험, 파행적 교육현실, 토론문화의 부재 등이 지적된다.
▦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의 사회
“정권이 한번 바뀌면 공직 사회는 물론 일반 기업체의 중역들, 심지어 언론사의 간부들까지도 특정지역 인사들로 물갈이가 됩니다.
전 정권이 시작한 사업은 정치논리에 휘말려 유야무야되고 새 대통령을 역사적 인물로 만들려는 새로운사업이 시작됩니다.
야당이 되는 즉시 돈줄이 끊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정(司正) 바람이 휘몰아쳐 자칫하면 감옥행이 됩니다. 그러니 죽기살기로 정권을 지키려 하고 또 빼앗으려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여야가 싸우지 말라는 소리는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지요.” 민주당 J의원의 솔직한 토로다. 실제로 이 의원의 말을 뒷받침하듯 이 당의 한 중진의원은 지난해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발언, 물의를 일으켰다.
지난해 의약분업 논란 당시 의·약계 양측으로부터 ‘독살’협박까지 받았다는 한나라당 K의원. “목소리 큰 X이 이긴다는 말은 시정잡배들에게나 통용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국가정책도예외가 아니라는 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결국 의사, 약사들의 이해를 보전해 준 결과 오늘의 의보재정 위기가 초래된 겁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양보와 타협의 논리보다는 승자 독식(獨食)의 원리에 익숙하고, 그래서 막무가내식우격다짐이 통하는 저급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진술들이다.
▦ 전쟁, 그리고 짧은 민주주의 경험
“과거 민주주의, 자유 등 거대이슈를 놓고 갈등하던 시대에는 비록 긴장감은 높았지만 나름대로 명분과 품위가 있었지요.
오히려 탈냉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지역주의, 당파주의 등 사적 이해관계가 이러한 거대이슈를 대체했고 그럼으로써 사회 갈등이 세속화한 측면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거 영웅주의적 시대 관점에서 보자면 최근의 갈등은 저질스럽고 탐욕스럽게 비칠 수 있지만, 그러나어차피 민주주의는 ‘평범하고 탐욕스런 개인’이 이끌어 가는 사회 아닙니까.
단, 우리 사회가 서구와 다른 점은 사적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절차와 제도적 틀, 이를 뒷받침하는 개인의 시민윤리가 아직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고려대 서진영(徐鎭英ㆍ정치외교학) 교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양상을 보이는 우리 사회의 갈등 문화를 이처럼 진단했다.
그리고는 “1987년 이후를 민주화 역사로 본다면 이제 불과 10여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는 성숙된 민주주의 문화가 뿌리내리기에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과도기”라고 규정지었다.
반면 불행했던 근현대사 경험과 연관지어 문제의 근원을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홍일식(洪一植) 전 고려대 총장은 “‘나’를 제외하곤 모두가 잠정적인 ‘적’으로 존재했던 6ㆍ25 동란의 생채기가 아직 국민 의식의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면서 “생존의 수단으로 타인에 대한 불신은 물론, 더 나아가 핍박하고 약탈해야 했던 전쟁 경험이 국민성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홍 전 총장은 “이후 수십 년 군부독재와 남북대치라는 험난한 세월을 겪으면서 ‘악착스러움’, ‘그악스러움’이 생존 비결이 되는, 순박함과 양심을 갖고는 도저히 살아 나갈 수 없는 투쟁일변도 사회가 됐다”고 덧붙였다.
▦ 교육도 갈등을 조장한다
기성세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라나는 세대는 다르겠지 하는 믿음 역시 현재 상황 하에서는 부질없어 보인다.
30년 가까이 학생들을 지도해 온 서울 강남 K고의 김모 교감은 “97년 학생생활 기록부가 도입되고 대입에서 내신성적이 절대변수로 부각되면서 학교 분위기는 한마디로 ‘살벌’해 졌다”고 개탄하면서, 이러한 교육현장의 풍토가 갈수록 사회갈등이 증폭되는 현상과 무관치 않음을 지적했다.
예나 지금이나 ‘입시지옥’ 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같은 학급의 동료 급우들이 단순 경쟁자를 넘어서서 ‘진학의 장애물’이 되는 적대적 관계로 변질됐다는 얘기다.
김 교감은 “친구가 못해야 내가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저급하고 상호 파괴적인 극단적 이기심이 고교생들을 지배하고 있다”며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조화로운 팀 플레이를 할 수 있을지는 정녕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대구 S고의 한모 교사의 견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교실이 마치 정글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 절반, 진학을 포기한 학생이 절반인데 이들은 서로를 경멸하고 심지어 대화조차도 없는 형편입니다.
어느 교실에나 왕따가한 두 명씩은 존재할 뿐 아니라, 다른 대부분 학생들도 언제 자신이 왕따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지냅니다.”
연세대 오인탁(吳麟鐸ㆍ교육학) 교수는 “갈등이 파괴적이 아니라 생산적으로 표출되기 위해서는 타인과 본인의 욕망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져야 한다”며 “기본적으로 초중고 시절 이런 조정능력이 함양돼야 하는데 현실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고 답답해 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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