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열광하는 베이징(北京)을 주재국 현장에서 지켜본 것은 중국인을 다시 알게 된 기회였다.이 곳에 주재한 지 여러 해가 됐지만 13일 밤 같은 베이징을 본적은 없었다. 그날 올림픽 개최지 확정발표가 나오기 직전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 있던 인파는 줄잡아 수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확정 발표 10분 후 인파는 10만으로 늘었고1시간 후 광장에는 무려 40만여 명이 운집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밤 중에 모두 오성홍기(五星紅旗)와 엠블럼 등을 들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있었던 건지, 왜 저렇게 광란에 가까운 환성과 환호를 보내는지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중국의 저명한 문명비평가 린위탕(林語堂)은 예전에 “중국은 개인주의로 형성된 나라이다. 팀워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인 카드놀이인 후패(鬪牌)는 각자가 자기 자신을위해 노는 것이고 포커를 즐기지만 브리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그런 중국인들이 저렇게 자발적으로 애국주의 열정으로 광분할 수 있는가. 그 근저에는정치, 경제, 문화, 환경에 미칠 국가적 효과도 있겠지만 그건 ‘머리’가 내놓는 분석일 뿐이다.
그러나 베이징의 열광을 함께 지켜본 한 대학교수의 설명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여겨질 만했다.
여기에는 한 세기 동안의 국가적 치욕을 보상하고 싶은 염원, 가깝게는반미(反美) 감정이 중요한 기재로 깔려 있다고 그는 해석했다.
1993년의 2000년 올림픽 유치 실패,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의 15년지연, 유고 대사관 오폭, 중미 항공기 충돌 사건 등이 모두 그동안 중국인들의 반미 앙금을 짙게 해 왔다고 그는 지적했다.
“이날을 위해 격한 반미 감정을 눌러왔으며 억눌렸던 반미 정서가 폭발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공산당 3대 법보인 통일전선 전략을 이제는 반미로 집중해야 한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활화산의 폭발이었다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휴화산의 대폭발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송대수베이징 특파원 ds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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