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10일 미 공화당 보수파의원들의 황장엽(黃長燁)씨 초청과 관련, “국가적 자존심과 주권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미 정부가 절차를 밟을 경우 황씨의 방미를 허용할 수 있다”고 가닥을 잡았다.‘국가적자존심과 주권에 문제되지 않는’ 절차는 미 정부가 정식으로 황씨의 방미를 우리 정부에 요청하고 신변 안전을 보장해야 하며 한미 양국이 이를 위한 구체적인 협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 의회나 외교위원회 차원에서 황씨 초청을 결의하는 것도 우리를 배려하는 절차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황씨의 방미 허용 검토는 정부가그 동안 취해온 부정적 자세에서 방향을 전환한 것으로 보이지만, 미 의회의 보수파 의원들이 추진하는 황씨 초청의 절차와는 궤를 달리한다.
황씨를 초청한 크리스토퍼 콕스 공화당 정책위원장이나 헨리 하이드 하원 외교위원장 등이 중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주장이 일급 경호를 필요로 하는 황씨의 방미를 허용할 수 있는 충분한 절차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역으로 우리 민주당이나 한나라당 의원들이 미 정보기관이 보호하는 요인을 여의도 세미나에 초청하면 미 정부가 무조건 보내주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 신상옥(申相玉) 최은희(崔銀姬)씨 부부, 장수길 전 주(駐) 이집트 북한 대사 등이 탈출,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의 접촉 요청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 정부는 장수길 전 대사 등을 아예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았다. 황씨와 같은 일급 경호를 받는 요인을 외국에 보낼 때는 세심한 주의와 절차를 밟아야하며 이는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는 최소한의 의무라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따라서 정부는 큰 틀에서는 황씨의 방미를 막지 않기로 하면서도 콕스 위원장 등이 요청한 ‘황씨의 7월 중 방미’는 절차 미비로 불허한다는 방침이다. 외교 당국자들은 이를 ‘전략적모호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허용하겠다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사실상 불허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전략적 모호성은 한미관계, 남북관계를 모두 고려할 때 취할 수 있는 적합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는 “미국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황씨가 전할 북한의 내부 정보를 입수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미 공화당 보수파들이 황씨를 초청하는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공화당 행정부가 외교적 미숙함, 능력부족 시비에 휘말리는 상황에서 미사일방어체제(MD) 등을 추진하기 위해 ‘공분(公憤)의 대상’을 설정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에 무작정 동조해서는 안 된다는 뉘앙스다.
아울러 북한에 대해 남북대화의 조속한 재개가 황씨의 방미논란을 지엽적 문제로 만드는 해법이라는 압박용 메시지를 보내는 측면도 있다.
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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