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묘하다. 정치와 비교하면, 그 자체로서는 중요한 다른 분야, 다른 화제가 이내 빛을 잃고 한가로운 이야기로 들린다.정치색을 띤 논쟁이 벌어지고 그 논쟁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도 참여하면 더하다. 다른 모든 이야기는혼자서 읊어대는 음풍영월(吟風詠月)로 느껴진다.
그 때문에 정치가들은 쟁점을 만들고 언론은 논쟁을 부추기고 내로라 하는 인물들은 정치색 짙은 논쟁에 기꺼이 한 발을 담그고 독자는 논쟁의 다음 장을 찾는 것일 것이다.
지난 주 일기 시작한 ‘곡학아세(曲學阿世)’ 논쟁은 쉬 가라 앉지 않을 전망이다. 언론도, 문제의 국회의원도 관심을끊은 자취가 없고 10일에는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작가 이문열과 여러모로 대비되는 작가 황석영이 “(일부작가가 올바르지 않은 글로) 곡학아세하는경향이 있다”고 발언하고 나섰다.
이 논쟁이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더 뚜렷한 증거는 이문열 씨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munyol.pe.kr)에서는오만했던 책 반품 발언을 사과했지만 메이저 언론에 책 반품 주장자들을 중국의 홍위병에 비유하는 글을 다시 기고했다. 또 다른 반론이 곧 따를 것이라는점을 그가 모를 리 없다.
작가 이문열은 의심할 바 없이 당대의 작가이다. 그의 수십 권에 이르는 소설들은 94년에 벌써 1,000만 권 이상 팔렸다.
우리 국민의 4분의 1이 그의 책 한 권은 읽었다는 뜻이 된다. 그의 소설은 양만이 문제된 것은 아니다.주제, 소재, 관심이 한 작가의 것인가 할 만큼 다양하고 주제에 따라 소설을 형상화하는 형식과 문체까지 적절히 달리하여 ‘이문열론’과 ‘이문열 문학’을 대두시켰다.
그의 일부 글이 미리 계산된 이야기이며 또 다른 일부 글은 우연에 의지한 대중 연애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폄하도 있지만 작가는 평균작이나 하급작이 아니라 수작으로 평가하는 법이라는 말에나는 편들고 싶다.
그러니 작가 이문열이 정도에서 벗어난 지식이나 학문을 공부했다고는, 곧 ‘곡학(曲學)’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세(阿世)’에대해서는 그의 말처럼 “어쩔 수 없이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 논쟁의 시원이 된 그의 2일자 조선일보 기고문은 동기에 대해 의심이 없을 수없다.
그가 언론이, 조선일보가 권력이며 그 자신이 문화권력임을 모를 리 없고 언론과 정부 둘 중에서 택일하라면 언론을 선택하겠다는 말이 말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세상에 울림을 가질 것을 예측 못했을 리 없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 사실과 타당성, 품격 외에 작가의 의도, 동기도 참고하는것은 “문체는 사람”임을 믿기 때문이다.
대가급이 된 그는 ‘시베리아 횡단기’로, 고향의 문학관 소개기사로 늘 자신을 탄탄하게 지지해주는 신문사와 더 밀착할 수 없었더라도, 아마 그 자신도 알고 있듯 신문이 숨 넘어가는 것은 아닌 이 때, 길게 생각한 후 발언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박금자 편집위원 parkj@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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