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황종연씨는 1990년대 여성소설이 이룩한 성과를 “여성적인 삶의 내밀한 양상들이 솔직하고 정련된 표현을 만나게 해준 것”이라고 규정했다(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묻혀지고 가려졌던 여성적 경험을 길어올려 빛을 발하게 한 것이 90년대 여성문학의 성과라면, 2000년대 여성소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최근 거의 동시에 발간된 5명여성 작가들의 소설은 90년대의 여성성에서 출발하면서, 나름의 독특한 개성으로 2000년대 문학의 방향을 탐색하고 있다.
이평재(42)씨의 단편소설집 ‘마녀물고기’(문학동네 발행)는 무의식의 세계를 글쓰기의 모티프로 삼았다.
제 몸으로 매듭을 지어 다른 물고기를 죽이는 마녀물고기,물리면 바로 사망하는 독을 지닌 푸른고리문어, 인간의 몸에 붙어 에너지를 흡수하는 불가사리 등이 등장한다.
지독한 악마성을 지닌 이런 괴물들과 벌이는 몽환적인 섹스는 환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소설 속 괴물들이 “내가누구인지 모르겠어?”라고 묻게 하면서, 이씨는 실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깊이 파고 든다.
장편 ‘물의 말’(한겨레신문사발행)에서 박정애(31)씨는 ‘피지배자로서의 여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은 90년대 작가들 역시 주목했던 주제이긴 하지만, 박씨의 경우 이 문제를 생생한 이야기로 형상화한 것이 돋보인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운동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성 3대가 겪은 수난과 투쟁의 역사라는 튼튼한 서사구조를 짰다.
“문학과 존재의 뿌리를 페미니즘에서 찾는다”는 박씨는 “나의 페미니즘은 어머니 세대와의 단절이 아니라 그들의 저력을 계승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첫 단편집‘피스타치오를 먹는 여자’(문학동네 발행)를 펴낸 류소영(28)씨는 92학번이다. 그는 동년배 젊은이들이 공감하는 ‘기댈 곳 없는 막막함’을 표현하는 데 몰두했다.
그 무렵의 학번들에게는 희미하게 남은 최루탄 연기와 막 닥쳐올 신세대 세상 사이에 낀 어정쩡함이 ‘기억의 전부’이다.
신처럼 믿었던 이데올로기는 저물었지만, 완전히 등돌리려고 하면 자의식이 발목을 잡았다. 류씨는 80년대 후일담 문학의 바통을 넘겨받아 90년대의 후일담을 쓰는 것으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한다.
김미진(39)씨도 네번째 장편소설 ‘그 여름 정거장…’(문예중앙 발행)을 들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조선 황실의 복원을 위해전주 이씨 가문의 양자로 들여진 남자가 미대생과 우연히 만나면서 경험하는 사랑 이야기로, 영상세대의 감수성을 드러내는 특유의 필치가 돋보인다.
박수영(38)씨의 장편 ‘매혹’(광개토 발행)은 교수와 여제자의 불륜을 그린 소설. 금기의 영역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욕망과 좌절을 나타내기 위해 성(性)이라는 쾌락에 무너진다는 고전적인 소재를 선택했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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