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종주국영국의 신문이 국가 통제를 벗어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광고수입 증대로 국가나 정당에 기대지 않는 재정 독립을이룬 것과 함께, ‘신문세(稅)’ 폐지에 따른 것이었다.이때까지 신문 발행에는 거액 국채 매입을 의무화하고, 개별 신문에는 인지세 등을 부과했다.
책임 있는 자산가만 신문의 영향력을 갖게 하고, 무분별한 선전ㆍ선동을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목적은 무산(無産) 노동계층을 대변하는 급진적 신문 발행을 방해하고, 신문값을 높여 사회 저변의 신문 구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런 규제를 어긴 신문 발행인과 기자들은 구속 기소됐다. 그러나 급진 좌파 언론은 조직적인 인지세 거부 운동으로 독자를 200만명으로 늘려 합법신문을 앞질렀다.
당시 14세 이상 인구가 1,000만명 선이었으니, 국가 통제가 무력해진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회를 주도하던 글래드스턴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인지세 폐지를 추진하고 나섰다. 언론, 즉 신문의 자유를 지고(至高)의 가치로 쳐든 것은물론이다.
■그러나 기업가 등 중산층을 대변한 개혁 진영의 숨은 의도는 시장 경쟁을 통한 자본주의 신문의 확대와 좌파 신문 견제였다.
인지세 폐지와 값싼 상업신문 보급은 노동계층의 ‘사회적 교화’ 를 촉진, 노동조합운동 등을 저지하는데 유용할 것이란 계산이었다.
시장을 통한 사회적 규제가 국가 통제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1855년 인지세 폐지로 신문 구독이 크게 늘자, 급진 좌파 신문은 거대 상업 신문에 밀려 급속히 위축됐다.
■글래드스턴은 ‘신문의 자유는 체제 수호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은 20세기 들어 언론 개혁을 위해 세 차례 구성된 왕립 위원회로 이어졌다.
거대 자본이 신문을 장악한 병폐를 지적하면서도, 유럽 대륙과 같은 법률적 규제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방송을 공공 서비스로 간주,법으로 규제하는 것과 대비된다. 언론 자유와 언론 개혁은 모두 고상한 명분이지만, 그 바탕에는 체제 이념과 시대 정신이 걸려 있는 미묘한 문제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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