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의 소녀들이 이다음에 무슨 직업을 가질까 라는 꿈을 꿀 때, 그 꿈은 다채로울까. 내가 소녀이던 50여 년 전 그 꿈은 너무나 단조로웠다.남자 아이들이 대통령 군인 운전기사 경찰 국회의원 등이 되겠다고 자랑스럽게말할 때 여자아이들은 선생님 간호사 등 서너 개의 직업을 겨우 떠올렸다.
지난 3일 여성주간 기념식에서 여러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평등행진’을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소녀처럼 가슴이 뛰었다.
역장(驛長), 경찰서장, 군법무관, 오토바이 순찰대, 우체국장, 법무부 수사관… 오늘의 소녀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다채로운 꿈을 꾸겠구나, 한국 여성들이 참으로 먼 길을 왔구나 라는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평등 행진’의선두에 서있는 백년 전 이백년 전의 여성들을 보았다.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억눌린 삶을 살면서 “이게 아닌데.
여자라고 이렇게 살 수는 없는데”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들이 생각났다.
나는 종이지만 내 딸까지 종으로 살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어린딸들을 데리고 야반 도주를 했다는 어머니, 내 딸은 공부를 시켜서 나와 다른 생을 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행상을 하며 딸의 학비를 벌었다는 어머니, 끼니를 거르면서도 딸들에게 “큰 꿈을 가지라”고 가르쳤다는 어머니…주변에서보고 책에서 읽은 훌륭한 어머니들이 기쁘고 당당한 얼굴로 ‘평등행진’의 선두에 있었다.
오늘 여성의 지위는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고달프다. 여자가있는 곳에는 으레 차별이 있고, 어렵게 직업을 구해도 결혼과 출산에 따른 부담을 대부분 여자가 감당해야 한다.
여자가 경찰서장이 되고, 역장이 되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일해 본 여성들은 잘 알고 있다.
“사표를 던지고 싶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그들은 고백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직장 여성들이 사표를 썼다 찢었다 하고 있을 것이다.
여자들이 어려울 때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마다 어머니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자를 억누르는 인습 속에서 그들이 품었던 기원, “내 딸들은 나와다른 삶을 살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의 덕분으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자각을 해야 한다.
그런 자각을 통해서 여자들은 좀 더 강해지고, 책임감으로 마음이 깊어지고, 세대를 뛰어넘는 연대감을 느끼면서 갈등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딸들에게 희망을!” 이란 슬로건 앞에서 여자들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는것은 선대 여성들로부터 진 빚을 후대 여성들에게 갚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족계획운동이 시작된 1960년 가임여성 1인 당 출산아 수는6명이었고, 91년부터 1.7명 수준이 됐다.
60년대 이전에는 7~8명 자녀를 가진 가정이 흔했다. 우리는 이 숫자에서 여성의 고단한 삶을 읽을수 있다.
7~8명의 자녀를 낳았다면 그 여성은 7~8년을 임신상태로 살았다는 얘기다. 지금처럼 생활이 편리하지도 않고, 여유도 없었던 그 시절에다산(多産)이 얼마나큰 부담이었겠는가.
한국여성이 갈 길은 아직 멀다. 대학 신입생 중 여학생 비율은 40%가 넘지만,여성취업은 너무나 좁은 문이다.
전체 공무원 중 여성비율은 22.4%, 그러나 1급에는 여성이 한명도 없고 2급 0.5%, 3급 1.7%를 겨우차지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전문직 여성들의 머리 위엔 더 이상 뚫고 올라 갈수 없는 ‘유리지붕’이있다는 말이 있는데, 한국 여성들의 머리 위엔 아에 하늘이 보이지 않는 ‘시멘트지붕’이 있다고 할 만 하다.
그러나 금년 안에 여성 장군 탄생이 예고되었고, 경찰에서도 경무관 탄생이 점쳐지고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꿈조차 꿀 수 없던 일이 현실화하고 있다.
소녀들은 대통령 장군 사장 과학자 등 다양한 꿈을 제한 없이, 커트라인 없이꾸며 성장하고 있다. 그들 세대의 발전은 얼마나 눈부실까를 생각하면서 선대 여성들이 딸들을 위해 품었던 기원을 다시 뜨겁게 느껴본다.
발행인 mschang@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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