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년 7월6일 체코의 종교 개혁가 얀 후스가 독일 콘스탄츠 교외에서 화형당했다. 46세였다.후스는 보헤미아의 후시네츠에서 태어나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한 뒤 모교에서 가르치며 총장까지 지냈다. 그는 또 가톨릭 사제로서 프라하의 베들레헴 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후스가 주재하는 미사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당대의 관행을 벗어나 있었다.
그의 미사는 라틴어가 아니라 체코어로 진행됐다. 성서 강독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위해 후스는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했는데, 이 체코어성서는 체코어의 정서법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오로지 성서만을 권위의 원천으로 인정하고 교황의 무류설을 부정했으며, 당시의 관행이었던면죄부 판매와 성직 매매를 맵게 비판했다.
후스는 또 사제들이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당연한 주장은 그 당시에는 그리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부정 축재, 성적 난잡, 알코올 중독이 사제들에게 만연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흔히 대분열이라고 불리는 혼란의 와중에 있어서 후스의 이과감한 주장을 잠시 묵인하고 있었지만, 1410년 피사 종교회의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알렉산더 5세는 후스에게 그 동안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요구했고, 그 후임인 요하네스 23세는 이듬해에 후스를 파문했다.
후스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자 교회는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후스를 소환했다. 후스는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안전보장 확약을 받고 공의회에 참석했지만, 교회는 후스가 계속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자 그를 체포해 이듬해에 태워죽였다.
후스의 죽음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후스 지지자들과 신성로마제국 군대 사이의 15년에 걸친 후스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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