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고국(故國)이 아니라 고국(苦國)입니다.” 한국판 ‘엘도라도’를 꿈꿨던 대다수 재중 동포들은 ‘코리안 드림’은 악몽이었다고 입을 모은다.중국에서는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거금을 빌려 불법체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렵게 한국에 오지만 ‘2등 국민’이라는 비아냥과 이들의 약점을 이용한 사기 피해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경기 화성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돼 강제추방될 처지에 놓인 김모(26ㆍ여)씨의 사연은 기가 막히다.
랴오닝(遼寧)성에 살던 김씨는 1999년 1,500만원의 빚을 지고 고국에 산업연수생으로 왔다. 결혼만 하면 국적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산업연수생을 그만두고 불법체류자 신세가 됐다. 하지만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고 애써 모은 800만원마저 빼앗긴 채 남편의 신고로 이곳에 왔다.
김씨는“차라리 한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다시 돌아가 빚쟁이에게 쫓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중국에선 아내와 두 아이를 둔 어엿한 가장이던 현모(45)씨는 1,300만원의 빚을 주체하지 못하고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다. 8개월 동안의 봉급 800만원을 1년이 지나도록 받지 못하고 있다. 고향의 남은 가족들 역시 빚쟁이에게 집을 뺏겨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한국 체류 중인 상당수 재중 동포는 임금 체불, 열악한 근로 환경, 주거생활불안 등 육체적인 고통을 겪고 사기꾼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에 대한 단속도 심해져 강제 추방된 재중 동포의 수도 해마다 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에 잠입하는 재중 동포는 급증추세다. 3일 본보가 입수한 중국 공안당국의 ‘중국 랴오닝(遼寧)성 2000년 밀항사건’ 수사자료는 밀항행렬의 실태를 상세히 담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지린, 랴오닝,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의 도시, 농촌등에서 한국에 가려다 체포된 밀항사건은 12건 539명이며, 인지한 사건은 17건 798명에 이른다. 중국공안 당국은 문건에서 검거율이70.6%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연간 밀항자 수는 수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밀항에 성공하더라도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계속되는 단속과 재중 동포를 상대로한 사기 행각이다. 일자리는 물론, 기거할 방도 구할 수 없어 쪽방에 의지하거나 노숙생활을 하는 재중 동포들을 서울 가리봉동 등에서 쉽게 목격할수 있다.
그러나 해법은 전무하다. 재중 동포 정모(42)씨는 “한국정부는 재중동포들을 범법자 취급만 할 뿐 대책을 마련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며 “재중 동포 스스로 힘을 모으면 단속의 칼을 맞기 때문에 나설 수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와 관련 서울조선족교회는 5일 서울사직공원에서 재중 동포 1,000여명과 ‘조선족 동포의 생존과 인권을 위한 기도회 및 십자가행진’을 개최할 예정이다.
서울 금천구 가산동 ‘중국동포의 집’ 최태송(崔泰松ㆍ39) 목사는 “기본 인권마저 무시된 채 방치되고 있는 재중 동포의 의식주 문제만이라도 해결해야 한다”며“무엇보다 재중 동포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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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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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협회 이영숙회장
“(재중 동포들은)빚을 갚을 수 있다면 양잿물이라도 마실 수 있다는 심정이에요.”
한국을 방문중인 ‘한국ㆍ중국초청사기피해자협회’ 이영숙(李英淑ㆍ66) 회장의 간청은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이 회장은 4일 기자와 만나 “고국에서 사기피해를 당한 재중 동포는 차라리 형편이 나은 편”이라며 “고국에 오지도 못한 채 현지에서 돈을 뜯긴 동포들은 죽는 일 밖엔 해결책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시에서 중학교 교사로 일하던 이 회장이 사기를 당한것은 1994년. “고국에서 기(氣)학원을 열면 돈도 많이 벌고 보람도 있을 것”이라는 한국인의 꾐에 빠져 한족 등으로부터 빌린 인민폐 4만원(한화 800여만원)을 통째로 날려야 했다.
이 회장은 그때부터 초청사기피해 구명운동에 나섰다. “현재 증거자료가 확실한 (초청사기)피해자만 1만 7,000여명에 이릅니다.
사기피해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지난해 201명, 올해는 326명으로 늘었습니다.” 이 회장은 “사기피해 희생자 대부분이 홧병, 자살, 심지어 사채업자들에게 피살되기까지 한다”고 전했다.
고찬유기자
■가리봉동 조선족거리
서울 구로구 가리봉1동 가리봉 시장 일대. 이 곳에서는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무작정 한국을 찾아 온 재중 동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벌집지대’로 유명했던 이곳에서 재중 동포들은 월세 8만원의 2평반 짜리 쪽방 생활을 하며 막노동 등 고달픈 돈벌이에 나서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500여m에이르는 가리봉 시장 골목에는 재중 동포들의 삶과 애환이 그대로 배어 있다. 빽빽한 한문 간판, 코우뻬이(고량주가 담긴 컵술) 깐더우부(건두부)같은 중국 식품을 파는 20여곳의 가게. ‘중국 노래 있음’이라는 간판을 내 건 10여개의 노래방 등이 낯선 ‘재중 동포 거리’를 연출한다.
3년째중국 식품점을 운영하고 있는 곽모(45)씨는 “하루 일을 끝낸 고단함을 달래려 재중 동포들이 사 들고 가는 800원짜리 코우뻬이가 가장 많이 팔린다”고 전했다. 금은방주인 박모(54)씨는 “손님의 90%가 재중 동포”라며“이들은 돈을 모으는게 최대 목적이기 때문에 현금이 모일 때 마다 금으로 바꿔 간다”고 귀띔 했다.
이곳의 재중 동포들은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여서 정확한 숫자 파악은 힘들지만 인근대림동 지역까지 합해 대략 1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산신도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재중 동포 윤모(52)씨는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꾸며 닥치는 대로 일한다”며 “요즘은 단속이니 뭐니 해서 강제로 쫓겨 날까 봐 더욱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던 재중 동포 최모(49ㆍ여)씨도 “한국에 나올 때 진 1,000만원의 빚도 다 못 갚았는데 돈을 더 벌어 가야 한다”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녹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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