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일이다. 경기도 어느 곳에서 생면부지의 시골 노인 한 분이 찾아왔다. 곧 있을 지방의원 선거에 나갈 예정인데 그 때 쓸 공약을가져 왔으니 ‘전문가선생님’이 한번 살펴 봐 달라는것이었다. 얼굴 뻔한 동네에서 지키지 못할 공약을 하고 싶지 않다는이야기였다.건네준 문건을 받아 보니 ‘중소기업공단유치’ ‘병상 200개 이상의 종합병원 유치’ ‘재정자립도의 획기적 제고’ 등 모두 여덟 가지 공약이 적혀 있었다.
당혹스런 일이었지만 생면부지의 교수를 찾아 온 노인을 열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붉은 펜을 잡고서는 하나씩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공단의 유치는 시ㆍ군의 사무가 아니라 군의원 후보가 공약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고… 병원은 재정적인 보조 없이는 유치가 불가능한데 선생님께서사시는 군의 재정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고…’
이래서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하나씩 지우다보니 여덟 개 중에 하나만 남았다. 그 하나 남은 것이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위한 결혼상담소 개설’. “이것도 군의 사업소로 만드는 경우에는 상급 정부의 까다로운 승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공약도 제가 보기에는 굳이 군의 사업으로 추진하시기보다는선생님 댁 마당에 사무실 차려 놓고 혼자 해 나가시는 것이…”
채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이 화를 벌컥 내었다.“지방자치를 한다더니 도대체 뭐가자치야,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면 도대체 뭘 하라는 거야.”
선거가끝난 뒤 당선자 명단을 살펴보았지만 노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공약없이 출마했다가 떨어졌는지, 아니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입후보 자체를 그만 둔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노인의 열정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선거가 있고, 그 선거를 바탕으로 지방의회가 다시 구성된 지 만 10년이 되었다. 광역의회의 경우 지난 7월1일이 꼭 10년째 되는 날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노인이 찾아온다면 이제는 몇 개의공약을 지우지 않고 남길 수 있을까?한마디로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한것이 없다.
지방의회가 관여할 수 있는 사무의 범위는 여전히 제한되어있고, 중앙정부나 집행기관에 비해 그 권력적 위상 또한 지극히낮은 상태이다.
전문성도 말이 아니다. 올바른 지원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관계로 지방의원 개개인의비전문성이 지방의회 자체의 비전문성으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권한도없고 전문성도 떨어지다 보니 지방의원들은 쉽게 무력감에 빠진다. 발의권과의 결권의 행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집행기관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견제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챙길 것만 챙기겠다는 태도가 나타난다.
참신하고 유능한 인재가 몰려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경향은 낮은 경제적 보상과 잘못된 선거제도로 인해더욱 심각해진다.
우리의지방의회를 이대로 둘 것인가?권한도 부여하지 않은 채 쓸모 없는기구로 비하하고 지방의원을 조롱의 대상으로나 삼는 지금과 같은 태도를 그대로 견지할 것인가?
다시이야기할 필요 없이 우리는 분권화를 가속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분권을 바탕으로 한 지역단위의 자율성과 창의성의 고양과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상황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분권과 자치의 핵심기구인 지방의회를 이대로둘 수는 없다. 분권화 시대에 맞는 적절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지방의회의 위상을 강화하고, 유급제로의 전환과 선거제도의 개혁을 통해 지방의회에 유능한 인재가 모이게 하는 등, 대폭적인 개혁 작업이 있어야 한다.
국민대교수 김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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