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7월5일 프랑스의 시인 장 콕토가 파리 교외의 메종라피트에서 태어났다.1963년 몰.한국 독자들은 콕토라는 이름에서 흔히 “내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라는 2행시를 떠올릴것이다.
이 시는 ‘칸’이라는 제목의 연작 단시 가운데 다섯번째 작품이다.칸은 국제 영화제로 잘 알려진 지중해 연안 도시다.
파리의 부르주아들을 비롯해 전세계의 부자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 이기도 하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콕토는 어린 시절 겨울마다 가족과 함께 칸을 찾았고 그 곳을 제2의 고향으로 부르곤 했다.
부자집 자식답게 콕토는 일찍부터 파리의 사교계를 드나들었고, 17살 때 ‘콕토시 낭송의 밤’을 열어 올되게 시단에 데뷔했으며, 20살때 처녀 시집 ‘알라딘의 램프’를 냈다.
뛰어난 시인들로 바글거렸던 프랑스 시단에서 콕토가 최일급이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다재다능에 관한 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일차적으로 시인이었지만, ‘무서운 아이들’을쓴 소설가이기도 했고, ‘바쿠스’를쓴 극작가이기도 했고, ‘미녀와 야수’를 쓴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고, ‘에펠탑의 신랑신부’ 등 발레 각본을 쓴 안무가 이기도 했고, ‘직업의 비밀’을 쓴 평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더 나아가 영화 감독, 삽화가, 포스터 디자이너, 재즈 연주가, 무대 장치가로 활동했다.
그의 사교 범위는 발레 프로듀서 디아길레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화가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시인 아폴리네르 등 당대의 일급 예술가들을 아울렀고, 레종도뇌르 훈장, 옥스퍼드 대학 명예 박사학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아메리카 아카데미 회원, 프랑스-헝가리 협회 명예회장, 칸영화제 명예회장 등 세속의 온갖 명예가 그를 찾았다. 호화찬란한 삶이었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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