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붕괴를 예언한 사람이 있었던가. 독일 통일 후 한스 마이어가 신(新)독일 전체에 던졌던 비장한 물음이다.마이어는 통일독일을 ‘신독일’이라고 불렀다. 그는 1989년 가을 라이프치히 평화혁명 당시까지도 동독 멸망을 예견할만한 그 어떤 증빙서류도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마이어는 1957년경 한 남자가 이미 동독의 멸망을 예언했다고 폭로한다. 1957년이라면 동독 건국 후 채 10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다.
이 예언은 놀랍게도 한 시인의 붓끝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것도 동독 건국 당시 사회주의 이상국가에 대한 이념을 주도했고 문화국장관이었으며 이후 어용시인으로 간주되었던 한 남자로부터. 그 시인의 이름은 요하네스 베혀이다.
그가 동독 건국 10년도 채 안된 시기에 이미 동독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이 충격적인 시의 제목은 ‘바벨탑’이다. 이 시는 이렇다.
‘소문은 떠들썩하고, 진실은 침묵한다. 말씀이 단어가 된다. 의미없이 소멸되기 위하여. 그것은 바벨탑. 무너질 때 무(無)로 붕괴되리라.’
말씀이 단어가 된다ㅡ. 이 암호 같은 짧은 시구가 이 시인이 예언한 동독의 멸망이다. 말씀, 즉 전쟁과 계급 없는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대한 신념에 찬 약속의 말은 건국 후 채 10년도 되지 않아 지배라는 피비린내 나는 목표를 은폐하기 위한 불순한 말, 즉 공허한 단어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말씀이 단어가 된다는 이 시구에서 마이어는 베혀가 이미 건국 초기에 자신도 모르게 동독 멸망을 예언했던 그 운명적 느낌에 전율한다.
그리고 30여년 후 베혀의 예언대로 동독이라는 바벨탑은 무너져 그야말로 무(無)로 붕괴돼 버린 것이다. 이 예언의 시를 쓴 베혀가 동독의 새 국가(國歌)의 작사자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충격을 더한다.
정말이지 동독 초기의 이상국가에 대한 정열은 치열해서 거의 금욕적인 것이었다. 동독은 건국 이후 우선 국가를 버렸다.
당시 국가는 1841년 시인 폰 활러스레벤이 지은 ‘독일 찬가’였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독일이여, 모든 것 위의 독일이어라.
세계의 모든 것 위에.’ 이 시는 하이든의 곡 ‘신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에 붙여져 불리던 중 히틀러 제3제국에 의해 독일의 국가로 승격되었다.
그리하여 독일나치의 군대들은 바로 이 노래를 부르며 온 유럽을 정복해나갔다. 나치에 의해 악용된 이 독일 국가는 결국 당시 유럽인들에겐 ‘정복자의 노래’ 혹은 ‘학살의 서곡’이 되었던 셈이다. 이것이 동독이 건국 후 가차없이 옛 국가를 버린 이유이다.
시인 베혀가 가사를 쓴 새 동독 국가 속의 유토피아는 ‘어머니가 다시는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나라’이다.
브레히트도 그즈음 작은 애국가라고 불리우는 ‘어린이 찬가’를 썼다. 이 찬가에서 브레히트는 ‘우리는 다른 인민들 위에도, 그 밑에도 서지 않으리’라는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광기에 찬 나치의 정복과 확장의 가치가 공존과 평등의 가치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동독이 새 국가를 만든 반면 서독은 나치에 의해 악용됐던 국가의 1절과 2절을 봉인하고 ‘단결 정의 자유는 행운의 보증’이라는 중립적 내용의 3절만을 사용해 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통일 후에도 통일독일의 국가로 남았다. 요즘 통일독일용 새 국가가 필요하다는 긴급요청이 구 동독권에서 나오고 있는 것은 그래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장 인기 있는 대안은 바로 브레히트의 ‘어린이 찬가’이다.
동독 건국 초기의 이 모든 풍경들, 즉 반전, 반파시즘, 이상국가에 대한 갈증에 지적(知的) 지진을 일으킨 것이 바로 마이어였다.
그는 당시 감히 당적(黨籍) 갖기를 거부한 대담한 자유인으로, 또 괴테, 토마스 만, 뷔히너, 발자크, 플로베르의 현란한 해석자로 40호 강의실에 모인 사회주의 새세대 엘리트들의 지적 갈증에 불을 질렀다.
더구나 그는 이 강의실로 수많은 동서독 지식인들을 초청했다. 시인 브레히트, 바하만, 엔젠스베르거, 그리고 막 소설 ‘양철북’을 발표한 젊은 서독작가 귄터 그라스를 주저없이 40호 강의실에 초대해 학생들 앞에 세운 사람도 마이어였다.
마이어는 또 당시 동독 밖으로 여행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특권인사 중 하나였다. 그는 자주 파리, 서독 등지의 특별강연에 초대되었다.
결국 마이어의 이 세계성과 끔찍한 개방성이 동독정부를 긴장시켰다. 당 지도부에 사이렌이 울린 것이다.
마이어는 철저하게 검열당했고 추적당했다. 마이어는 그 상황을 ‘오웰적 분위기’라고 쓰고 있다.
함께 이상국가를 건설하자던 동독정부는 건국 채 10년도 되기 전 국가란 이름의 빅브라더, 즉 교활한 감시자로 변질돼 있었다.
결국 그 위험한 밀월은 당서기장 울브리히트가 1961년 8월13일 베를린장벽 구축을 명령함으로써 끝장이 났다.
국가의 이 배신이 마이어를 고독 속에 몰아넣었다. 그의 정신적 동지들도 이미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브레히트도 베혀도 죽고 블로흐는 베를린장벽이 건설되자 서독으로 망명한 뒤였다. 베를린장벽 구축 2년 후인 1963년 마이어는 서독 바이로이트의 바그너축제에 참가한 후 동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망명한 것이다.
그의 망명이유는 짧았다. “더 이상 제자들은 보호할 수 없어서”였다. 자신의 망명이 정치적 압박에 의한 것이라고 소란떨지 않고 침묵했던 향기로운 그의 지조를 제자들은 지금도 숙연해한다.
망명 5년후인 1968년 마이어 신화의 영지였던 카를마르크스대학 40호 강의실은 세계 수준의 새 대학건물을 짓겠다는 울브리히트의 야심에 의해 가차없이 폭파되었다. 그러나 그날의 그 고성능 폭약도 마이어 신화를 폭파하지는 못했다.
마이어는 옛 동독 지식인들 가슴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스승, 마지막 정신적 대부였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베를린 도로틴묘지의 헤겔과 브레히트, 베혀 곁에 묻은 후 바로 지난달인 6월9일 라이프치히 독일도서관에 다시 모였다.
그곳에 모여 타계한 그에게 명예시민권과 추모의 말을 헌정하며 그들은 그렇게 독일역사의 상처인 동독과 이별하고 있었다.
내가 그 한스 마이어의 추모식을 통일독일 11년에 치르는 구동독 마지막 ‘정신적 국장(國葬)’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날 소설가 크리스타 볼프는 스승 마이어의 자서전 ‘시한부 독일인’을 낭독했고, 크리스토프 하인은 스승에게 추모의 글을 바쳤다. 그의 추모사는 이렇다.
“20세기 독일문학의 가장 탁월한 천재, 문학비평가, 역사가, 소설가, 논쟁의 장인, 스승과 친구가 당신 한 몸에 담겨있었습니다.
당신은 독재에 대한 항거자였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간직하기 위해 동독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진정한 의미의 동독의 옹호자였고 새 해석자였습니다.
독일인이면서 독일인에 의해 추적, 밀고 망명까지 내몰렸고 두 독일을 오가며 당신의 정신적 지조를 간직해야 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지금 당신의 책들은 우리시대의 경전(經典)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가고 당신의 제자가 여기 당신께 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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