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작가 고골리가 쓴 소설 ‘죽은 혼’은 19세기전반 러시아에서, 이미 사망했지만 호적에는 아직 생존자로 올라 있는 농노를 사러 떠돌아 다니는 치치코프라는 사기꾼에 관한 이야기이다.그는 농노를저당잡혀 국가기관으로부터 거금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농노의 소유주 행세를 하러 들었으니, 영낙없는 러시아판봉이 김선달이다.
이 작품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치부를 얼마나 속속들이 절묘하게 풍자했던지, 제 1부 원고를 미리 읽은 푸쉬킨은 “이 모든 것은진실이다.
러시아는 얼마나 슬픈 나라인가”라고 말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인간을 소유하고 매매ㆍ양도하고 저당잡히고 유산으로 물려줄 수있게 되어 있던 농노제가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ㆍ평등의 이상에 눈뜬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고 체제변혁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일깨웠음은 당연하다.
러시아 농민들은 서유럽에서 농노제가 존속하고 있던 14, 5세기 이전까지만해도 오히려 상당한 인신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이같은 상태를 반전시킨 농노제의 성립은 몽골 지배를 극복하고 금장한국 후계국가들의 공격에 대응하는과정에서 이루어진 군제 변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몽골 지배 이전 러시아의 주요 병력을 형성한 것은 공(公)들의 무장수행인집단인 드루쥐나였다. 드루쥐나는 공으로부터 현물 혹은 현금으로 급여를 받았으며, 자신이 섬기던 공을 떠나 다른 공에게 봉사할 수도 있었다.
드루쥐나는기병이었고 주로 도시 민병대로 구성되는 보병이 이를 보충했다. 전법은 교전상대 사회의 전법에 대응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니, 곧 키예프는 비잔티움으로부터,북서부 지방은 서유럽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경기병은 초원지대 유목민들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숲과 강, 늪지가 많은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보병의역할도 중요했다. 이들은 성벽과 성문을 방어하며 토목, 수송, 척후 활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전투부대에서 궁병으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러시아 군제는 몽골군대에 대응하기 위해 바로 그 몽골 군제를 모방하는과정에서 변화하였다.
이제는 보병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기병대의 의미가 훨씬 커졌다. 러시아 군대는 두 날개처럼 적군을 에워싸서 기습하는 전형적몽골식 전법을 채택한 데다 무기와 군복까지 부분적으로 몽골 것을 차용하였다.
군대를 다섯 부대로 편성하는 것도 몽골군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러나중요한 것은 전법의 변화보다, 병력의 사회적 성격의 변화였다.
몽골 지배 이전인 12세기 후반부터 러시아의 드루쥐나는 분화하고 있었으니,그 상층은 보야레라 불리는 특권적 혈통귀족으로 변하여 토지를 세습적으로 소유하며 스스로 드루쥐나를 거느렸고 공들에 대해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하층 드루쥐나는 여전히 공들에게 봉사하면서 그가 주는 급여로 살았다. 이들은 공의 궁정에 봉사하는 신하라는 의미로 드보르라 불렸는데, 몽골제국에도이 비슷한 조직이 있었던 데다가 몽골 지배 하에서 민병대는 철폐되었으므로 드보르의 군사적 중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러시아의 통일과 독립 과정에서 혈통귀족층의 충성심을 믿지 못하게 된 모스크바대공-차르들은 드보르층을 집중 육성하게 되었다.
특히 몽골로부터의 독립 선언 후 새로 등장한 국경수비 과제와 늘어난 행정수요는 드보르층의 증대를요하였다.
이제 러시아 국경은 남쪽과 동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는데, 기나긴 초원지대 국경을 금장한국의 후계한국들(크림한국, 노가이한국)에 맞서 지켜내는것이 러시아 정부의 큰 과제였다.
이들 한국은 러시아의 독립을 인정치 않고 러시아에 종주권을 행사코자 하여 국경을 빈번하게 공격했기 때문이다.
서쪽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했으므로, 러시아 국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에서 돈강에 이르는 국경지대 요소요소에 방어선을구축하여 요새와 망루를 세웠으며 병력주둔지를 건설하여 군사령관의 관할 아래 두고 드보르층 기병대로 하여금 연중 일정 기간 순회근무를 하게 하였다.
차르 정부는 군사ㆍ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드보르층에게 토지를 수여하고 이토지에 거주하는 농민노동력을 무상으로 이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군관직 종사자들은 급여토지 보유자란 의미에서 포메시치키라 불렸으며 봉직기간에 한해서토지를 보유하고 농민들로 하여금 이를 경작케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농민노동력을 포메시치키에게 어떻게 확보해 줄 것인가였다. 키예프시대이래 러시아 농민은 밀린 빚이 없으면 자유로이 다른 곳으로, 혹은 다른 지주에게로 옮겨갈 수 있었다.
그런데 국방의 새로운 주역이 된 중소 포메시치키의보유지는 대개 농민 5, 6호 정도 규모로 영세했으므로 농민생활이 대지주 소유지에서보다 더 어렵고 농민착취의 정도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포메시치키 토지를 떠나 대지주에게로 옮겨가거나 아예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변경지대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포메시치키들은 정부에 대고, 농민의 거주이전자유를 제한 혹은 금지시켜 달라고 호소하였다.
차르정부는 이들의 호소에 귀기울여 차츰 농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였으며,이주를 금지당한 농민이 도주한 경우 이들을 추적하여 되잡아올 수 있는 권리를 토지보유자 혹은 소유자에게 부여하였다.
이러한 이른바 ‘추쇄(推刷)’의시효는 도주 시점으로부터 5년에서 시작해서 차츰 늘어나다가, 1649년에 편찬된 법전에서는 마침내 철폐되었다.
한 번 어떤 사람의 토지에 거주하게된 농민은 영구히 그 토지에 붙박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농노제의 법제적 완료였다.
다시 말해 국방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토지보유제가창설되었고, 농민의 농노화는 이로 인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푸가초프 농민전쟁에서 보듯 러시아 농민들은 농노제 철폐를 외치며 대대적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이는 번번이 실패했고, 차르정부와 지주들의 농노억압은 그 때마다 더 심해져, 18세기에 이르면 농노는 앞에서 본 것처럼매매ㆍ저당ㆍ양도ㆍ유증의 대상이 되어 동산노예(動産奴隸)와 다를 바 없는 상태에 떨어졌다.
186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결국 농노해방을 선언하였으나농노제의 유제는 계속 남아 혁명가들의 집요한 공격대상이 되었다.
광활한 러시아 땅을 둘러보다 보면 이런 나라에서 식량을 자급하지 못한다는사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흑토대의 부식토는 쟁기질이 필요없고 호미로 파서 씨만 뿌려도 작물이 자랄 만큼 비옥한 토양이라는데...물론 현재의 농업문제는 농노제와는 무관한 것이고 수송과 유통의 문제로 인한 폐해가 더 큰 것이 사실이지만, 농민들이 자신의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역사는 소련시절 집단농장에서도 되풀이되었으니, 농민층의 이러한 뿌리뽑힌 삶이 농산물 부족이라는 현상으로 고난의 역사에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모른다.
엄청나게 확대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민중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예속민이 되어 가야만 했던 과정을 보며 인민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러 주말농장 '다차'-부유층 전유물로서 도시인 휴식처 변모
그 옛날 러시아 농민들의 고된 삶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즘 러시아 대도시주민들은 삶의 즐거움을 농촌에서 보내는 주말에서 찾는다.
대도시에서 승용차로 2시간 안팎 거리의 농촌에 ‘다차’를 지어놓고 그곳에서 농사를 짓거나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주말별장 또는 주말농장쯤 되는 다차는 원래 부유층의 전유물. 그러나 1980년대부터 도시의 노동자들도 보유할 만큼 보편적이됐다.
다차행 열기가 얼마나 거센지 역사에세이팀도 실감했다. 모스크바에서 3시간이면간다는 블라디미르를 향해 차를 타고 나섰는데 길이 막혀 다섯시간이나 걸렸다.
그날이 바로 러시아의 주말인 금요일 오후였던 것. 모스크바 주민들이다차로 가기 위해 일제히 승용차를 몰고 나왔기 때문이다.
다차가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차에서 주말을 보내는 데,주변 시골길을 산책하거나 가족 파티를 여는 등 휴식을 취한다.
가까운 이웃이나 손님도 불러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감자 토마토 오이 양파등을 기르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기른 채소와 과일 중 남는 것은 길거리에서 판매한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수즈달로 이어지는 길가에는다차에서 기른 버찌등을 파는 주민들이 즐비했다.
다차는 보통 목재로 된 1, 2층 건물과 텃밭으로 이뤄져 있으며 페치카등의 난방시설도 갖추고 있다. 특정 지역에 직장 단위로 다차지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공동 관리인까지 두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이 소득은 낮아도 생활 만족도가 높은 것은 다차에서 보내는주말생활이 한 몫을 한다고 현지 가이드는 일러주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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