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과 무관한 연구용역에 계속 매달리다가는 아무 것도 못할 것 같더군요. 교수들 뒤치다꺼리도 힘들구요.”서울대 사회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과정 도중에 유학을 결심한 A씨.
전공분야와 상관없는 연구용역 때문에 정작중요한 전공공부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는 A씨는 “수료를 하더라도 제대로 된 논문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학문 후속세대들이 서울대를 등지고 있다.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거나 수료한뒤 논문제출을 앞두고 있는 대학원생 중 상당수가 ‘연구다운 연구’를 위해 외국행을 택하고 있다. 올 들어서만 이미 휴학을 포함한 중도포기자가 500명이 넘는다.
대학본부의 한 관계자는 “박사과정생의경우 군 휴학이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가운데 상당수는 외국유학을 가는 셈”이라고 말했다. 공대의 한 교수도 “해마다 50여명이 외국 유학길에 오른다”고 전했다.
박사과정생이나 박사과정 수료자가 외국행을 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공과 무관한 연구용역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 여기에는 지도교수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는 대학원의 도제식 사제관계도 큰 몫을 차지한다.
공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9월 미국 유학길에 오를 예정인 B씨는“교수들 사이에는 외부 연구용역을 많이 수주하는 교수가 ‘능력 있는 교수’라는 인식이 팽배해있다”며 “위계적 지위관계 때문에 지도교수의 용역연구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대학원생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자연대 박사과정생 C씨도 “전공과 무관한 연구용역을 제안받더라도 ‘찍히면 그만’이라는생각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며 “수료 후 유학을 가기 위해 외국대학 몇 곳에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전했다.
국내 대학들의 ‘외국박사 선호’도 외국행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서울대조차도 교수 신규임용시 본교 박사학위 소지자를 외면하는 게 현실이다. 실제 전체1,600여명의 교수 가운데서도 본교 박사학위자는 5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특수한 경우인 의대(300여명)와 국문과, 국사학과 등을 제외하면 서울대에서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학본부의 현직 보직교수조차 “학부 때 두각을 나타낸 학생은 내가 뒷바라지를 해서라도 유학을 보낸다”고 말할 정도다.
경영대 박사과정생 D씨는 “전공과무관한 연구용역에 매달리느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것을 지켜본 교수들이 본교 출신 박사를 임용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사회대의 한 교수는 “교수들 사이에 유학했던 국가와 대학을 중심으로 학맥이 형성돼 있어 교수 채용의 1차 관문은 ‘유학 학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병기(李秉基) 연구처장은 “뛰어난 인재를 키울수 있는 제대로 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며 “대학원생들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과 함께 교수 임용시 객관적인 업적평가가 가능하도록 보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양정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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