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봄날 하얀배꽃이 질 때는 눈이 내리는 것 같다. 부안의 시기(詩妓) 매창(梅窓ㆍ1513~1550)은 흩날리는 배꽃을 보고 ‘이화우(梨花雨)’라고불렀다.
그의 마음에 눈물비가 내리고 있었던 탓이다. 연인을 떠나보낸 날에 지는 배꽃은 그에게 애처로운 빗줄기로보였으리라.
장마철의어둑한 비구름이 조금씩 걷힐 무렵 전북 부안에 도착했다. 번잡스런 도시 모양을 닮아가는 부안을 감싸안은 성황산이 눈에 들어온다. 성황산 기슭의서림(西林)공원은 매창의 시비가 자리한 곳이다.
매창 시비는1974년 이 고장 태생인 문필가 김태수(金泰秀ㆍ작고)가 세운 것이다. 앞부분에 매창이 남긴 유일한 시조인 ‘이화우’를 새겼고, 뒷부분에는 매창의 행적을 기록했다.
시비 위쪽에는 매창이 앉아 거문고를타곤 했다는 바위 ‘금대(琴臺)’가 있다. 주변의 너럭바위들은 오래 전 이 고장의 현감, 시인들이 각명해 놓은 시구로 가득하다.
이곳은 매창과 시인들이 시회(詩會)를열었던 장소이다. 매창 시비를 세운 김태수의 아들인 김민성(金民星ㆍ74) 부안문화원장은 “지금 이곳에선 매년 노인들이 모여 전국 시조회를 개최하고, 초중고교생들이 ‘매창백일장’을 열고 있다”고 전했다.
‘이화우’는 매창이 19세 되던 해에 만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과 멀어진 뒤 지은 작품이다. 촌은은 천민 출신이지만 청절(淸絶)한 시문(詩文)으로이름을 날렸던 인물.
1532년 부안에 내려온 그는 명기 매창을 만나게 된다. 용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한시와 거문고에 능하고 성품이 바른 매창을가까이 하면서 촌은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파계했다”(‘촌은집ㆍ村隱集’).
깊은 정분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그러나 2년 뒤 촌은이 한양으로올라가면서 헤어지게 된다. 사랑하는 님과 이별한 뒤 매창은 고통스런 심정을 시조와 한시로 달랬다.
후세 사람들에게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남겨진 한글시조 ‘이화우’이지만, 그가 남긴 글은 ‘이화우’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시다.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억석(憶昔)’이그 하나이다. ‘임 귀양살이 간 것은 임진, 계사였어라/ 이 몸의 시름과 한을 뉘와 더불어 풀었으리/ 호올로 거문고 끼고 고란곡을 뜯으면서/ 구슬픈 마음으로 삼청 세계계실 그대를 그려보네’ (謫下當時壬癸辰此生愁恨興誰伸 謠琴獨彈孤鸞曲 悵望三淸億玉人ㆍ이하 역문은 최영이ㆍ崔榮伊의 ‘매창 문학 연구’를 따름)
기생으로서는이미 늙은 나이인 28세에 매창은 허균(許筠)을 만났다. 허균은 전국 방방곡곡을 기생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난봉꾼이었지만 매창의 한시와 노래, 거문고에반해 10년 동안 ‘정신적인’ 교분을 나눴다.
그는 매창의 재주를 사랑했고, 절조 높은 뜻을 헤아려오랫동안 시들지 않는 관계를 유지했다. 매창의 말년 시 세계가 도선 사상에 가까워진 것도 허균의 권유에 힘입은 바 크다.
‘증우인(贈友人)’이라는시에서 매창은 허망한 이승생활에 집착하지 않고 초월적인 선계(仙界)를 지향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술병 속의 세월은 차고 기울지 않았지만/ 속세의 청춘은 젊음도 잠시일세/ 후일상제께로 돌아가거든/ 옥황 앞에 맹세하고 그대와 살리라’(壺中歲月無盈缺塵世靑春負小年 他日若爲歸紫府 請君謨我玉皇前).
한평생 부안을 떠나지 않은 매창은 말년에 이르러 외로움과 눈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한시로 노래하곤했다.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몸이/ 굶고 떨며사십년 길기도 하지/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사는가/ 가슴 서글퍼 하루도 안 운적 없네’(空閨養拙炳餘身 長任飢寒四十春 借間人生能幾許 胸懷無日不沾巾).
기생의운명이 그러하다. 유난히 섬세한 감정을 타고 났지만 신분의 제약이 그의 운신(運身)을 옭아맸다. 정들만 하면 떠나고 마음 붙일만 하면 헤어지는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마음의 고독과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던 매창은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668년 부안에서 가장 큰 절인개암사(開岩寺)에서 매창을 기리며 ‘매창집(梅窓集)’을 발간해 그의 한시 57수를 후대에 전하게 됐다.
부안 사람들이매창에게 갖는 정은 각별하다. 백발 노인부터 나이어린 꼬마들까지 ‘매창 할머니’라고 부르며 매창의 한시를 읊는다.
부안읍에서 주산면 쪽으로 2㎞쯤 가다 보면 오리현 아라지 방죽을곁에 둔 매창공원이 있다. 매창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부안 사람들은 이 무덤이 있는 곳을 ‘매창뜸’이라고 부른다.
매창이 죽은 뒤 45년 만인 1655년 무덤 앞에 작은 돌비석이 세워졌다. 매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무꾼과 농사꾼 같은보통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매창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누구라 할 것 없이 해마다 서로 벌초를 하며 매창이 누운 자리를 다듬었다. 그만큼 부안사람들이 매창의 거문고와 시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석의 글이 이지러지고 못쓰게 되자,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부풍시사(扶風詩社)’는 ‘명원이매창지묘(名援李梅窓之墓)’라 새겨진 비석을 다시 세웠다.
부안=글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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