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살면서 잊을 수 없는 일이 한 두가지랴마는 너무나 놀랍고 기가 막혀서 슬프다는사실조차 모른 채 넋이 빠져 몽롱했던 날이 1950년의 6월 25일이었다.청천의 벽력이 어찌 그리도 무섭고 어처구니 없고 두려울 수 있으랴. 북측 탱크가사흘 만에 서울을 휩쓸어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고 온 몸은 전기고문이라도 받은 듯 전신의 맥이 풀려 풀썩 주저앉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때 경복 중학교 3학년이었다. 아마 7월 4일인가 5일인가 세 번째학교에 갔을 때 운동장에 모여 무슨 선전선동을 듣고 줄지어 수송 국민학교로 갔다.
거기에는 수많은 우리 또래의 학생들이 있었다. 조금 있다 역시무슨 선전선동대회가 있었고 결의문이 낭독됐다.
“우리는 바야흐로 조국의 해방전선에 앞서 나갈 때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의용군으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듣고 겁이 나서 여럿이 눈치보면서 화장실로 가는 척하다 뒷담을 넘어 도망을 쳤다.어떻게 담을 넘고 누구와 같이 도망쳐서 집으로 갔는지 지금은 분명하게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래도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생생하게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운동장 지휘대앞에 중3생과 그 보다 어린 학생들 200여명쯤이 있었다.
눈에 핏발이 서고 살기가 등등한 5~6학년생들이 단상으로 올라가 “반동분자를잡아 죽여야 한다. 피의 숙청을 해야한다” 하더니 “우리는 그 반동의 괴수를 잡아 응징하였다” 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다시 뭐라고 서로 소리를 지르더니 뒤뜰 어디 역도장인지에서 무엇을 실어와서는 단상 옆에 내려놓았다.그러더니 한사람씩 차례로 단상 옆에 내려놓은 그 무엇을 똑똑히 보고 제자리로 가라고 호령하였다.
나는 그 때 난생 처음 시체를 보았다. 반쯤 뜬 눈에 전신이 퉁퉁 부어있고 온몸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우리 학생들이 모두 존경하고 따르던 대대장 선배였다.
가까이 대할 기회는 없었지만 의젓하고 늠름하면서 인자하였던 선배였다.눈 앞이 어른거리고 메스껍고 무섭고 너무나 기가 막히는, 상상도 못할 광경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가슴 아픈 광경을 잊은 일이 없다.“반동의 말로가 이것이다”라는 살기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울리는 것 같고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리가 띵하고어지럽다.
/정양모 경기대 전통예술감정대학원 석좌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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