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가수의 노래는 배경음악, 해외 올 로케, 음반의 몇 배인 수 억 원의 제작비, ‘얼굴 없는 가수’를대신하는 화려한 출연진…. 지금까지 성공한 뮤직비디오의 공식이다.조성모의 성공 사례 이후 김범수, 포지션 등이이 대열에 줄줄이 합류했다. 새 앨범의 필수품인 뮤직비디오. 댄스가수뿐이 아니다.
태진아, 신승훈, 이선희, 장혜진 등까지도 뮤직비디오를 만든다.
대개 주인공의 슬픈 사랑과 죽음을 줄기로 삼는 ‘드라마타이즈드’(dramatized) 뮤직비디오는 가수가 춤추며 노래하던 전통적 유형의 뮤직 비디오를 밀어내고 주류를 이루어 왔다.
이제 ‘그 밥에 그 나물’이식상하다. 보통 3~5분, 길어야 10분 남짓의 짧은 시간에 눈길을 끌려다 보니 고작 폭력과 선정성으로 화제를 만들기가 일쑤다.
노래에는 비장미가 넘치고 화면에는 유혈이 낭자하다. 보고 나면 음악은 들러리고, 폭파 장면만 기억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손꼽히는 다섯명 안팎의 감독들이 시장을 지배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말랐다. 툭하면 ‘방영불가’ 판정이 내려지는 것도 자극 위주의 내용과 화면이 낳은 결과다.
뮤직비디오 마니아들의 시선도 차갑다. 1999년부터 3,20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있는 뮤직비디오 동호회 ‘뮤비뮤비’ 회원들은 최근의 한 ‘블록버스터’급뮤직비디오를 이처럼 가차없이 혹평했다.
“또다시 창궐하는신비주의, 이번엔 몇 명이 죽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것 없다. 오히려 소박한 뮤직비디오가 그립다.”
이런 추세에 대한 반동일까. 최근 작품성으로, 높은 완성도로 ‘음악이있는 단편 영화’를 지향하는 뮤직 비디오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최근 나온 몇몇 뮤직 비디오는 음악과 어우러지는 정밀한 화면에 탄탄한 스토리, 해외 유명 감독까지 동원한 정교한 제작기법으로 ‘규모’가아닌 ‘작품성’으로 승부하고 있다.
뮤직비디오의 근간인 ‘음악’ 자체가 충실하고, 화면이 이를 톡톡히 받쳐줘 영화적 상상력을 높여준다.
음악채널 m.net의 정형진 PD는 “아름다운영상으로 좋은 음악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것이야말로 뮤직비디오의 진정한 가치다.
거기에 가수와 감독의 개성이 묻어있어야 한다” 고 말한다. 최근 호평을 받고 있는 몇몇 뮤직비디오를 보자.
▼김건모 ‘미안해요’-슬픈듯 행복한 애잔한 영상
“그대여 지금껏 그 흔한 옷 한 벌 못해주고…따뜻한밥 한끼 사주지 못하고…” 가사처럼,뮤직비디오도 전세대적 공감을 얻어낼 만하다.
현란한 화면과 스피디한 전개 등 뮤직비디오의 전형적인 제작기법 대신 자연스럽게 가사를 따라가며 ‘젖은손이 애처로워’ 류(類)의 정서를 담백하게 표현했다.
역설적이게도 ‘핑계’의경쾌한 도입부로 시작하여 가난하지만 행복한 연인들의 이별과 만남을 애잔하게 그렸다.
슬픈 듯 행복한 미소를 짓는장진영의 말없는 옆얼굴이 인상적이다. 미국서 단편영화를 전공하고 이선희(이별소곡), god(거짓말), 박진영(난 여자가 있는데) 등의 것을 만든 고영준 감독이 제작했다.
김건모의 고향인 부산에서 쓰러질 듯한 누옥을 찾아가며 찍은 ‘토종’ 뮤직비디오다.
김건모의 발랄한 이미지와는 낯선 복고적 정서를 짙은 지역성과 함께 그럴듯하게담아내 음악의 수용폭을 넓히고, 가수의 이미지 전환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브라운아이즈‘벌써 1년’-갈색화면·R&B 운율 절묘
김현주, 이범수에 와호장룡의 홍콩배우 ‘장첸’까지 캐스팅했다. 영화 ‘파이란’ 처럼 국내 톱스타에 해외배우까지 동원한 경우다.
서정성 짙은 화면으로 유명한 차은택 감독의 제작에 홍콩 왕자웨이 감독이 편집을맡아 본격적으로 뮤직비디오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작품이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어찌 보면 진부할 법한 이야기가 1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교차하는 세련된 구성으로 애틋함과 아쉬움을 남긴다.
무엇보다 음악과 화면의 매치가 절묘하다. 갈색톤의 차분한 화면과 스피디한 카메라 워킹이 부드럽고감성적인 R&B의 그윽한 운율, 탄력있는 리듬과 호소력 있는 보컬에 자연스럽게 묻힌다. 현재 세계 유수 영화제의 경쟁부문 출품을 위해 영어로더빙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얼굴 없는 신인 그룹 브라운 아이즈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고 이를 음반판매량과성공적으로 연결시켰다.
신인으로서는 드물게 하루 도매상 주문량이 1만 5,000여 장에 달한다. 세련된 영상과 내실있는 음악이 바람직한 상승작용을일으킨 경우다.
▼크라잉넛 ‘밤이 깊었네’-코믹가사·촌스러움의 만남
화려한 세트와 캐스팅 대신 톡톡 튀는 상상력이 있다. 테크노뽕짝의 원조 ‘이박사’가난데없이 화면에 등장해 “서울에‘이소룡 바이러스’가 퍼졌다”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홀연히 사라진다.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나선 멤버들이 거리에서 깡패, 수녀 등 온갖 사람들을 만나는 내용이다. 크라잉넛의 장난꾸러기 악동 같은캐릭터가 연기 같지 않게 생생하다.
이뮤직비디오는 크라잉넛 멤버들이 주연한 영화 ‘이소룡을 찾아랏’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오늘밤술에 취해 마차 타고 지친달을 따라가야지…” 하는 환상적 가사와 이소룡, 그리고 크라잉 넛이라는키치적(촌스런) 조합이 펑크의 상상력을 매개로 버무러졌다.
영화 ‘이소룡을 찾아랏!’은 12일 부천영화제에도 출품될 예정이다. 뮤직비디오와영화 모두 실험영화 프로젝트집단 ‘몽골몽골’의 강론 감독이 제작했다. 자본력 부족으로 자칫 ‘소리’로만머물기 쉬운 인디(독립) 정신이 거침없이 영상으로 재현됐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뮤직 비디오의 경제학
뮤직 비디오의 유행은 가요계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첫 손에 꼽히는 것이 제작비의 상승. 가요 관계자들에 따르면 뮤직 비디오 제작비는 최하 2,000만~3,000만 원, 최고는 5억~6억 원이다.
이중 가장 비중이 높은것은 배우 출연료와 해외 로케 비용이다. “웬만큼 얼굴이 알려진 배우를 데리고 해외에서 찍으면 억대가 기본”이라고한다.
감독 개런티 역시 일급은 억대가 넘지만 더러 돈보다 연줄이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벌써 일년’을 편집한 왕가위 감독도 개런티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처럼 뮤직 비디오가 새 앨범 발표의 필수품이 되다 시피한 상황에서는 웬만한 음반 제작비를 1억 원 정도라고 봤을 때 많게는 대여섯배 가까이 제작비가 늘어난 셈이다.
신인 가수의 뮤직 비디오를 준비 중인 A씨는 “음반만 만들 때보다 돈이 많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그만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스케줄, 인지도, 나이, 음악 장르 등에관계 없이 가수의 모습을 얼마든지 노출시킬 수 있고 케이블 TV라는 매체를 적극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블 TV가 가요의 주 소비층인 10대들 사이에서 공중파 TV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한 지는 이미 오래다.
때문에 요즘 매니저들은 공중파 방송사에 신보 돌리는 것 만큼이나 케이블 방송국 PD들에게 뮤직비디오 클립을 돌리는 데 공을 들인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뮤직 채널의 한 PD는 “하루평균 2개, 많게는 5개까지 받는다”고 말했다.
각 뮤직 채널들은 프로그램 사이에 광고처럼 공식적으로 돈을 받고 뮤직 비디오를 틀어주는 코너를 운영한다. m.net의 경우 1분짜리 클립을 4주 90회 방송하는 데 350만 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뮤직 비디오가 음반 판매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제작자들은 이 부분에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다.
뮤직비디오의 성공이 반드시 음반의 대박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성공 사례로 꼽는 것도 조성모, 포지션, 브라운아이즈, 김범수 등 몇몇 가수들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뮤직비디오 클립이 시중에서 판매되는 것도 아니다.결국 뮤직비디오에 드는 돈은 사실상 제작비가 아니라 홍보비인 셈이다.
홍보를 세게 한다고 반드시 물건이 좋은 것도, 그 물건이 많이 팔리는 것도아니다. 가요계도 예외는 아니다.
金知永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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