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분단 시절, 숱한 동독 주민이자유를 찾아 필사의 탈주를 감행했다. 베를린 등의 장벽이 구축된초기에는 장벽 중간에 낀 건물 창문이 손쉬운 탈출구였다.이마저 콘크리트로 봉쇄되자, 땅굴을 파거나 강과 바다를 수영과 보트로 건넜다. 서방 외교관승용차에 몸을 숨기는가 하면, 경비행기와 열기구로 탈출한 사례도 있다.
국경 곳곳에 도사린 자동발사총 등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탈주한 동독 주민은많을 때는 한 해 1,000명에 달했다.
■가장 극적인 탈주는 서독에 살던 동독 출신 청년이 동베를린에 있던 약혼자를 빼내 온 실화다.
그는 궁리 끝에 약혼자를 닮은 서독 여인을 사귄 뒤 함께 동 베를린 관광에나선다. 거기서 몰래 만난 약혼자를 당초 동행한 여인인 양 속여 장벽 검문을 통과한다.
여권도 없이 홀로 뒤처진 여인이 동독 경찰에 적발돼 센세이셔널한문제가 됐으나, 동독은 서독 국민을 송환할 수밖에 없었다. 도덕적 시비는 있겠지만, 모두에게 해피 엔딩인 셈이었다.
■동독은 서독의 경제지원을 대가로 주민의 서독 이주를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주로 노인들이었지만, 골치 아픈 반체제 인사도 포함됐다.
서독은 이들의 인권보호 차원에서 막대한몸값을 지불했다. 그러나 이런 탈주나 이주가 어려운 동독인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여행이 비교적 자유로운 다른 동구 국가를 서독 행의 징검다리로삼기 시작했다.
대표적 사례는 동독 총리의 질녀 일가족이 체코 주재 서독대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청한 사례다.
■동서독은 이들을 동독에 다시 보냈다가 서독 이주를 허용하기로 타협했다. 이를 계기로 서독과 서방 각국 대사관에서동독인들이 수백 명씩 농성하는 사태가 잇따르자, 난감해진 서독이 ‘망명 불허’ 방침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징검다리 망명’ 사태는 89년 가을 되살아났고, 동구 국가들이이들의 서독행을 허용한 지 한 달도 못 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비록 주변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탈북자 일가족의 베이징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농성도 여러 측면에서 그 귀추가 주목된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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