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대한민국에) 가지 못 한다면 온 식구가 죽음을각오하고 저 검푸른 파도에 몸을 던지고 싶습니다.”26일 중국 베이징(北京)의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로 피신한 장길수(17)군 가족의 탈북ㆍ도피생활은 죽음을 각오한 고난의 대장정이었다.
길수군 일가 친척 등 4가족 16명이 탈북을 시작한 것은1997년부터. 함북 회령에 살던 길수군의 외할머니 김춘옥(67ㆍ가명)씨가 그 해 3월 두만강을 넘었다. 남편(정태준ㆍ68)이 중국에서 귀국한‘성분 미해명자’로 분류돼 극심한 불이익을 당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20명을 채워야 쉽게 대한민국에 갈 수 있다”는한 한국인의 말을 믿고 가족들의 탈출을 계획했고, 98년 1월 북한에 다시 들어가 남편과 아들 대한(28ㆍ가명)씨 등을 데리고 나왔다.
이후에도 목숨을 걸고 북한에 남은 가족을 탈출시키는 등 길수군 가족의 자유를 향한 행렬은 계속됐다.
99년 1월 탈북한 길수군 또한 북한에 남은 가족을 ‘구출’해내기 위해 두 번이나 입북했다. 이 과정에서 다섯 번 체포당하는 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길수군은 수기에서 “1999년 8월 사회 안전국 순찰 대원들이 두만강을 건너던 나와 사촌(김민국ㆍ가명)을 끌고 가 창문도 없는 암흑의 심문실에서 11시간 동안 ‘개를 잡아 죽이듯’ 구둣발로 마구밟았다”며 “각목으로 맞아 터진 머리와 수갑이 채워진 채로 짓이겨진 두 손목은 피로 흥건히 젖었다”고 회고했다.
길수군은 북한을 탈출했다가 강제 송환된 이모를 구출하는 데 쓸 100달러 지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비닐에 싼 뒤 입속에 며칠동안 물고 있었고, 이 때문에 입 언저리가 부어 말을 못할 정도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극한의 굶주림을 피해 일단 강을 건넜지만 길수군 가족의 중국 도피 생활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다. 길수군은 “가는 곳마다 숨어 지내며 여기 저기서 빌어 먹기도 했다”며 “북한에서 왔다며(중국) 아이들까지 ‘거지 거지’하며 놀려대곤 했다”고 수기에서 밝혔다.
올 3월에는 어머니 정선미(46)씨와 삼촌 광철씨 등 가족 4명이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의 은신처에서탈북자의 밀고로 북송되고 남은 가족의 은신처마저 노출돼 최근 수개월 동안 피 말리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길수군은 이 와중에서도 국제언론과 후원인 등의 도움으로 99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비정부기구(NGO)대회에 가족의 탈북 동기와 과정,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그림 전시회를 열고 ‘눈물로 그린 무지개’라는 책을 펴내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길수군은 최근 구명운동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이번 가는 길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죽음보다 더 큰 난관이 앞을 가로막아도 끝까지 가렵니다”라고 다짐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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