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6월27일 ‘리텔라르니 리스티’를 포함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네 개 신문에 자유화를 촉구하는 ‘이천어 선언’이 실렸다.작가 바츠리크가 기초하고 육상 선수 자토페크, 체조 선수 차프라후스카 등 그 나라의 명망가 70명이 서명한 이 문서는 그 해 초에 시동을 건 체코슬로바키아 자유화 운동 곧 ‘프라하의 봄’의 정점이었다.
이 선언은 그 해 1월 이래의 자유민주화 노선을 더욱 과감히 밀고 나가 당에서 보수 세력을 몰아내라고 호소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는 이미 그 해 4월에 채택한 행동 강령에서 당이 민중의 신뢰를 잃은 이유가 ‘언행의 불일치, 솔직성 결여, 관료주의, 모든 것을 권력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습성’에 있다고 반성하고, ‘사회ㆍ정치 제도 전반의 민주화’를 다짐한 바 있다.
이천어 선언은 공산당 독재의 완화와 기업 경영의 민주화 등 개혁의 방향을 다시 한 번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추진하는 개혁파 당원들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1968년 1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 제1서기가 당에서 물러나고 개혁파의 둡체크가 그 자리를 이으면서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그 해 4월 공산당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 자유화 노선을 천명하면서 커다란 운동량을 얻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내용은 사법부의 독립, 견고한 의회 제도의 확립, 사전 검열제의 폐지, 민주적 선거제도의 도입, 언론ㆍ출판ㆍ집회의 자유 보장, 국외 여행 및 이주의 자유 보장 등 서유럽 민주주의의 요소를 많이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8월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5개국군 20만명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개혁파를 몰아냄으로써 프라하의 봄은 막을 내렸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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