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임(貞荏),곧을 정, 들깨 임. 남자는 ‘곧다’ 대신 ‘구김살없이깨끗하다’는 뜻의 ‘끼끗하다’를 써서 여자를 ‘끼끗한 들깨’라고 불렀다.남자는 옛 연인 ‘끼끗한 들깨’와 15년 만에 재회해 오래도록 울었고, 천오백억년 뒤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복거일(55)씨는7년만에 낸 장편소설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문학과지성사 발행)를 “시간의 압제에 맞서는 사내의이야기”라고 풀어줬다.
그는 좀더 친절하게 설명했다.“사내가 시간에 맞서는 곳은 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나는 자리고, 맞서는 방식은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다짐을 되살리는 것이다.”
‘마법성…’은 번역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쉰세살의 시인 한도린이 사랑했던 정임과 해후함으로써 15년이라는 빈 시간에 복수한다는 얘기다.
거칠게 말해 중년 남녀의 사랑에 ‘시간성’이라는 묵직한 철학의 주제를얹은 것이다. 시간이라는 무게를 버티기 위해 복씨는 동화와 시와 번역문을 함께 받쳤다.
주인공의딸이 지은 동화 ‘은자 왕국의 마지막 마법사’는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 ‘가정있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해설의 역할을 맡았다.
견습 마법사가 만난 할머니는 “진실을 알게 되면, 이해를 하게 되고, 이해를 하게 되면, 과거사에 밴 독이 씻겨나간다”고 말한다.
마법성을 찾는다는 어린 마법사에게 나루터의 노인은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면서“진정한 마법성은 기억”이라고전한다.
이제 마흔이 다 된 옛 사랑 ‘끼끗한글깨’는 “꿈으로빚은 마법성을 지키려고 단단한 현실의 군대와 맞선다.”
복씨의적나라한 주장을 소설 속에서 발견하는 것도 즐겁다.영어 공용화 논쟁을 이끌어낸 논객답게 복씨는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영어 문장을 구조가 다른우리말로 옮길 때 사라지는 풍요로움을 아쉬워한다.
교수들의 입을 빌어 매춘을 서비스 산업으로 받아들이고, ‘거리의 여인들’을 기업가로 대우해야 한다고주장하기도 한다.
이 소설이 5년 전 신문에 연재됐을 때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여겨졌지만, 올 5월 독일에서는 매춘을‘직업’으로인정하고 실업 수당과 연금수령권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잔인한시간에 저항할 때 복씨는 ‘시’를 무기로 꺼내 든다. “그림자 문든 짙어진 지금/ 나는 복수의 붉은 몸짓이다./
놀라 벌어지는 세월의아가리에 던진/ 땀 젖은 한송이다.” 바랜 시간에맞서 지나간 신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박수를 보낼 만하다.
그러나 그 신의가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복씨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소설을썼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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