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는 호주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은 일본 이스라엘과의 1차 예선을 통과한 뒤 이란 호주 쿠웨이트 홍콩과 홈앤드어웨이로 본선티켓을 다투었다.
77년 당시 홍콩의 세미프로팀인 세이코에서 뛰고 있던 나는 변호영(GK)과 함께 국가의 부름을 받고 최종예선에 참가했다.
홍콩을 1_0으로 꺾고이란과 0_0으로 비긴 우리는 8월27일 시드니에서 호주와 맞붙었다. 전반 24분 내가 백헤딩으로 내준 공을 차범근이 논스톱 슈팅, 선제골을 잡아내며앞서 나갔으나 후반 코스마나에게 연속 2골을 허용, 1_2로 무릎을 꿇었다.
최종예선에서 유일한 패배였지만 결국 이란에 본선 티켓을 빼앗기고 말았다.당시에는 승점제가 이겼을 때 2점, 무승부가 1점으로 혼전 양상이었지만 호주가 이란에 패하는 바람에 이란이 처음으로 본선에 올랐다.
키가 190㎝였던 나는 호주의 장신공격수에 위축되지 않고 제공권에서는 우리가 앞섰다.
키는 호주선수들이 더 컸지만 서전트점프는내가 높았기때문에 헤딩은 자신있었고 차범근과의 호흡도 잘 맞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드필드에 확실한 선수가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개인기를 충실히갖춘 미드필더들이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결국 이기기 위한 실전연습에만 몰두했을 뿐이었다.
11월5일 쿠웨이트와의 원정경기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차범근의 선제골로 앞서다 파이잘과 압둘에게 2골을 허용, 1_2로 뒤졌던 우리는 후반 38분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30m부근에서 얻은 프리킥을 최종덕이 직접 슈팅, 골네트를 갈랐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통쾌하다. 번쩍하는 순간에 볼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홍콩과의 마지막 경기에서내가 2골을 잡아내며 5_2로 승리했지만 이미 본선진출은 물건너간 뒤였다.
73년 뮌헨월드컵 예선에서 호주와의 재경기끝에 본선행이 좌절된 한을4년뒤에 곱씹은 셈이 됐다. 나에게는 마지막 월드컵 예선이었기 때문에 두고 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아시아대표로 출전했던 이란은 1무2패의 성적에그쳤지만 외국의 프로무대서 뛰는 선수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는 내가 나갔어도 주눅이 들어 발이 안 떨어졌을 것이라는 자괴감마저 들었지만 그래도 조국에대한 사명감으로 열심히 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약력: 김재한(54)씨는 건국대를 거쳐 72~79년 국가대표를 지냈으며,81~89년 주택은행 코치, 감독을 역임했다. 주택은행 개포동지점 차장, 본점 개인영업부장을 거쳐 2월부터 동부지역 본부장을 맡고 있다.
■78년 아르헨티나 대회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은 ‘군사독재’라는반대 여론속에 아벨란제회장이 이끄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정치는 정치고, 축구는 축구’라는 지원성명을 내는 등 우여곡절끝에 열렸다.
헝가리프랑스를 꺾고 8강에 올라오는 과정에서 심판매수설의 의혹을 받아야 했던 아르헨티나는 2차 리그에서 2조에 속해 브라질 페루 폴란드와 4강 진출을다투게 됐다.
폴란드와 페루를 각각 물리치고 격돌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주심의 편파 판정속에 0_0 무승부를 기록했다. 조 1위는 브라질-폴란드,아르헨티나-페루의 경기로 가려지게 됐다.
앞서 열린 경기에서 브라질은 폴란드를 3_1로 꺾어 결승진출이 확정된 것처럼보였다. 아르헨티나가 결승에 오르려면 페루를 4점차 이상으로 이겨야 하지만 1차리그를 1위로 통과한 페루를 4점차 이상으로 꺾는 것은 상상할 수없는 일이었기때문이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의 아르헨티나에서는 불가능이 없었다. 페루를 6_0으로 대파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수상한승리’는 세계 매스컴의 이슈가 됐다.
결승진출이 좌절된 브라질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페루영사관에 돌을던지는 등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네덜란드를 3_1로 이기고 첫 우승컵을 안았다.
또 이 대회는 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축구황제’에 등극한 디에고 마라도나의 데뷔무대이기도 했다.
여동은기자
dey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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