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견해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 편에 서서 싸우겠다.”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말로 전해지는 이 경구는 관용의 문화가 뿌리내리지 못한 모든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사람들의 입을 통해 거듭 인용돼 왔다.
이 경구를 한국의 정계에 널리 알린 이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다. 그는 지난 2월6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언론사에 대한 세무 조사가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키려는 정부의 의도와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세무 조사와 언론의 자유 사이에 관련성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우리헌법 제19조가 규정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 곧 사상의 자유를 이총재가 옹호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볼테르의 말을 인용했을 리가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이총재가 틀림없이 존경할 미국의 대법원 판사 올리버 홈스가 지적했듯,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총재가 옹호하는 사상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제약하는 오랏줄은국가보안법이다. 예컨대 불고지죄를 규정하고 있는 이 법 제10조는 명백히 위헌이다.
침묵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를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서도 중핵이기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상의 자유가 실효적이려면 그 자유가 개인의 내면적 결정을 밖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까지를 마땅히 포함해야 하므로, 찬양ㆍ고무죄를규정하고 있는 이 법 제7조도 위헌의 소지가 크다.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행위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구체적 행위로 이어지기 전에는, 즉표현의 자유의 행사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따르기 전에는 그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사회의 확립된 원칙이다.
더 현실적으로, 북한이 반국가단체라는 전제 아래 이 법이 규정하고 있는 잠입ㆍ탈출죄(제6조)나회합ㆍ통신죄(제8조)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 노력과 함께 확대되고 있는 남북간의 인적 왕래와 양립할 수 없다.
북의 지도자와 화기애애한 2박3일을보낸 대통령에서부터 금강산 관광객들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날마다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있다.
그래서 흘끗 보면 잠입ㆍ탈출죄와 회합ㆍ통신죄조항은 사문화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조항들은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발톱을 드러내고 선택적으로 적용돼 선량한 개인들의 삶을 순식간에 망가뜨릴수 있다.
6월 임시 국회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지만, 이번 회기에 국가보안법이 고쳐질것 같지는 않다. 민주당은 이번 회기에 개정안을 제출하겠다는 의사를 비쳤지만, 진심이 어떤지는 알기 어렵다.
집권세력의 한 축인 자민련은 이 법에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또렷하다. 사상의 자유의 옹호자인 이총재가 이끄는 한나라당도, 당론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개정을 반대하는 의원들이압도적으로 많다.
나라 안팎의 인권 단체들이 한 목소리로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이 법의 토씨 하나도 고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한국의 원내 제1당과제3당의 입장인 것이다. 결국, 반세기 넘게 한국인들의 머리 속을 감시해온 이 법은 이번 회기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다.
보기 민망한 것은, 이 법에 손질을 하면 세상이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떠는 일부 보수 언론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언론인들에게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 자유를 옥죄는 법을 존치하자고 주장하는 언론은 그러니까자신의 존재 근거를 허물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율배반이 보수 언론의 미욱함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 보수 언론이 언론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드러낼 따름이다.
★고종석 편집위원은 강병태 논설위원(월드워치), 박래부 편집위원(문화마당ㆍ이상 집필순)과 함께 매주 목요일자에 돌아가며 고정 칼럼을 쓰게 됩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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