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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의 독일이야기] (1)유토피아라는 이름의 高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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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의 독일이야기] (1)유토피아라는 이름의 高熱

입력
2001.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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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소설가 강유일(姜維一ㆍ48)씨가 통일이후 독일의 현장과 지성의 흐름을 전해 줄 ‘강유일의 독일 이야기를 오늘부터 매주 1회연재합니다.에른스트 블로흐의희망의 법칙이 보여준 유토피아 사상에서부터, 그 꿈이 사라진 자리에 피어나고 있는크리스토프 하인, 폴커 브라운 등 옛 동독 출신 세계적 문인들의 문학세계를 비롯해 음악ㆍ미술계의 흐름과 독일 대학사회의 분위기를 생생한 인터뷰와현장취재로 전합니다.

강씨는 통독 현장 지식인들의 모습을 통해 남북 통일을 앞두고 올바른 정신적 질과 차원을 대비하자는 집필 의도를 밝혔습니다. 2회부터는 수요일자로 싣습니다. /편집자 주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고열(高熱)

1944년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공동 집필한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지배(支配)이다.” 이념은 결국 지배, 즉 권력으로 추락하고 만다는 그의 진단은 옳았다.

1990년 10월3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그들이 시도했던 ‘유토피아 실험’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계급의 적(敵)’이라고 불렀던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의통합조약문서에 서명한 후 바로 그 서독에 합병됐다.

반파시즘과 계급없는 이상국가를 꿈꾸며 패전의 폐허 위에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창설했던 1949년 10월7일로부터 만 41년만에 스스로 제출한 파산신고였다.

물론 대부분의 구 동독 시민들에게 1990년 10월3일은 단지 정치적 통일의 날이다. 그들에게 통일은 이미 그보다 한 해 전인 1989년 10월9일,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 평화기도회 현장에서 일어난 기적적 사건이다.

그날 기도를 마친 7만 군중은 촛불을 들고 교회를 나와 침묵시위를 했다. 그 군중을 동독 지도부가 급파한 수많은 무장병력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럴 때 대체 한 개의 촛불이 한 대의 탱크 앞에서 어떤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날 시위대의 한 플래카드에는 지금은 신화가 된 말, “우리는 민중이다”가 쓰여져 있었다.

이 말은 게오르크 뷔히너의 혁명희곡 ‘당통의 죽음’에 등장하는 기습적 선언이다. 이 짧은 한마디가 그 날 시위의 혁명적 성격을 잘 암시하고 있다.

국민은 그 순간부터 국가가 지난 40년간 녹음기처럼 반복해온 저 불순한 유토피아, 저 수상한 희망을 거절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마르쿠제가 말한 저 ‘위대한 거절’,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국가의 미래는 국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동독 지도부는 그날 발포명령을 포기했다. 결국 이듬해 전승국과 양독은 독일 통일을 결정짓는 최종문서 ‘독일 관련 최종해결 조약’에 서명했다.

동독 역사 최고의 불안과 최고의 희망이 촛불 앞에서 펄럭였던 그 성니콜라이교회 광장에는 지금 교회 성전 내부의 기둥과 똑같은 모양의 기념조각 ‘니콜라이 원주(圓柱)’가 우뚝 서 있다.

이 지상의 많은 승리의 기념물들, 개선문, 오벨리스크, 승전비들에선 대개 살육과 도살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문을 연 이 빼어난 미모의 승전비 니콜라이 원주에선 심해에서 방금 건져낸 듯한 한 움큼의 건강한 수초 냄새가 난다.

이 기념비는 국제현상공모에 당선된 이 도시의 젊은 화가 스퇴츠너의 작품을 조각가 그래저가 형상화한 뒤 무혈혁명 10주년 기념으로 통독 대통령 요하네스 라우에 의해 그 장소에 헌정됐다.

중요한 것은 이 무혈혁명이 바로 20세기 초 온 유럽을 학살의 장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독일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는 놀라움이다.

그래서 언어의 함량이 정확한 독일인들조차 이 사건을 서슴없이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적의 통일로부터 다시 11년이 지났다. 그것은 구 동독 시민들이 통일 독일 속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수업을 시작한 지 11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요즘 그들은 통일 후의 현실이 정말 그들이 꿈꾸었던 통일의 초상과 같은 것인 지 스스로 묻고 있다.

평화혁명 후 계속되고 있는 성니콜라이교회 월요평화기도회의 공동기획자이며 과거 동독인민회의 대의원이었던 독문학자 크리스텔 하르팅어 박사는 내게 이렇게 고백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구입할 수 있다는 소비의 그 무한가능성, 그것이 통일 후 우리에겐 가장 무서운 충격이었죠.

인간이 원하는 물건은 모두 자본주의 진열장에 진열돼 있고, 그것도 가득 쌓여있다는 것…. 우리는 지난 40년 내내 물자부족과 물건을 사기 위한 줄서기에 녹초가 되어 있었거든요.

우리는 이념적으로는 전쟁과 계급 없는 유토피아를 함께완성시켜 간다는 공동체적 연대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서독제 커피, 담배, 초콜릿, 면도기, 스타킹, 심지어 화장비누가 그야말로 선망에 찬 마법의 물건으로 여겨지는 지독하게도 모순된 삶을 살았어요.

물론 통일 후 우리는 곧 알았죠. 자본주의 진열장의 그 풍성한 고품질의 물건들은 반드시 돈으로만 교환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더구나 수입에는 반드시 세금이 발생하고, 직장은 쫓겨날 수도 있는 곳이라는 무서운 사실도 알았죠. 통일은 우리에게 세금신고법과 해고통지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업적주의를 가르치면서 우리에게 다가왔어요.”

통일 후 참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최근에도 시인 폴커 브라운은 독일 최고의 뷔히너문학상을 수상했고, 뉘른베르크 게르만국립박물관은 유명화가 빌리지테의 대규모 회고전을 정치적 이유로 전격 취소함으로써 구 동독 예술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동독 시절 국가전복죄 누명을 쓰고 7년간 옥고를 치른 후 서독으로 망명했던 작가 에리히 뢰스트도 올봄 고향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일간지 폴크스차이퉁에 소설 ‘제국재판소’를 연재함으로써 과거와 악수하고 있고, 동독 지도부의 압력을 피해 서독으로 망명했던 신화적 인문학사가 한스 마이어는 라이프치히 명예시민으로 선정됐으나 시민증 수여식을 앞두고 5월19일, 94세로 타계함으로써 그의 신화에 신비를 더했다.

중부독일방송국은과거 동독 정보부 비밀정보원으로 활동한 언론인들의 전력을 속속 밝혀내 충격으로 술렁인다.

한편 괴테, 노발리스, 니체, 바그너 등이 수학했고 동독 시절 최고의 지성들을 길러낸 카를 마르크스 대학은 통독 후 라이프치히대학으로 개명됐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조각들, 동독 훈장과 깃발들은 이제 교외 벼룩시장에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며 팔리고 있다.

그래도 공산주의 혁명가의 이름들로 명명한 거리와 명소들, 즉 로자 룩셈부르크로(路), 카를 리프크네히트로, 아우구스트 베벨로, 클라라 체트킨 공원, 동독국가창설 기념로인 ‘10월7일 거리’는 살아 남았다고 시민들은 말한다. “살아 남았다”는 표현 속에 권력과 이념에 따라 출렁대는 정치적 히스테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통일 11년 후의 라이프치히에 서면 플라톤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국가’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계획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며 현존하지 않는 것을 갈망한다.” 이 말은 지금은 지상에서 사라진 단명했던 왕조, 동독이 앓았던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고열(高熱)에 대한 가장 적절한 헌사이다.

■강유일씨 약력

▦ 1953년 출생

▦ 1976년 경향신문 장편소설 공모에 ‘배우수업’ 당선으로 등단

▦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독문학ㆍ언어철학 전공( 년)

▦ 현재 라이프치히대학 독일문학연구소 동아시아문학 강사

▦ 장편소설 ‘백기’ ‘빈자의 나무’ 등 30여 편 발표, 독일어 논문 ‘독일문학 속의 혁명의 해부’ ‘아도르노의 무목적성과 에코의 열린 형식 사이에 놓인 부교에 대하여’ ‘국가는 레비아탕인가-엘렉트라 신화의 세 가지 변주’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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