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16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받았던 국민적 기대는 확실히 이전과 달랐다.뉴 밀레니엄의 첫 국회인데다, 그 말 많던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으로 상당수 구(舊) 정치인들이 걸러졌고, 전례없는 “바꿔, 바꿔” 열풍 속에 젊고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충원된 것 등이 남다른 기대를 걸게끔 한 이유들. 그렇게 시작한 16대 국회가 이제막 한돌을 넘겼다.
과연 얼마만큼 바뀌었을까. 아니 바뀌기나 한 것일까.
■한 초선 의원의 16대 국회 1년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생활이 즐겁고 보람차면 사람이 잘생겨 보이잖아요. 그렇다고즐거운 생활이라고 하기엔 뭣하고…, 그래도보람은 있나 봅니다.”
이종걸 의원은 “얼굴이 좋아졌다”는 의례적 인사에 물 흐르듯 ‘세련되게’ 말을 받았다.지난해 이맘때는 같은 말에 그저 수줍게 웃기만 했었는데. 사진 찍자고 하니 무려 5분이상 매무새를 다듬고서야 나왔다. 1년 새 훨씬 정치인 다워져있었다.
#1 좌충우돌 의정1년
이 의원은 의원배지를 처음 단 지난 한해동안 대정부질문과 5분 발언 각 1회, 법안소개 2회, 국가인권위원회법 대체토론 1회 등본회의장 단상에 모두 다섯 차례 올랐다. 반부패기본법 등 모두 10건의 법안도 발의했다.
지난해 12월부터 넉달간 법사위에있었던 것을 제외하곤 줄곧 보건복지위에서 일했다. 말썽많은 의약분업 도입과정에도 직접 관여한 셈. “쓰라린 기억입니다.
정말 그렇게까지 준비가안된 줄을 몰랐어요. 구체적 정보 없이 그냥 명분에 끌려다녔지요. 어쨌든 국회의원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걸 새삼깨달았습니다. ”
그러면서 그는 의료계 폐업 당시 직접농성현장을 찾아가 김재정(金在正) 의쟁투위원장을설득했던 일을 가장 기억나는 의정활동으로 꼽았다.
안동수(安東洙) 전 법무부장관 인사파동 후의 당 쇄신운동에도 앞장섰다. 인터뷰 중에도 향후 입장과 행동을 묻는 기자들의 전화가 여러 번 걸려왔다.“가시적인 변화가 없으면 안하느니만 못한 일이 되는데….” 그는 정말 고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2 제일 겁나는 건 취직부탁
지역구의원으로 가장 힘든 점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취직청탁을 받았는데 하나도 해주지 못한 점”이란다. “차라리1,000만원을 달라면 주겠는데 그 일은 정말 힘들더라”고도 했다. “왜 딱 부러지게 거절 못하느냐”는 질문엔 그냥 웃었다.
그는 일요일 조기축구회에 나가 한 두시간씩지역구민들과 어울려 땀을 흘린다. 자선행사나 바자회 등 온갖 지역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지역구 활동시간이 빠듯하다. “원래 쑥스러움을 타는 성격인데 많이 변했어요.
틈틈이 명함보고 이름 외우기를하는 등 노력 끝에 이제 척하니 알아보는 지역구민 만도 한 2,000~3,000명은 될 겁니다.”
#3 일년 만에 빚 2,000만원
그가한달에 정치활동에 지출하는 돈은 지구당운영비 800만원과 일반 활동비를 포함해 1000만원에서 1,200만원 사이.지난해 후원회에서 모금한 7,900만원과 예전에 근무하던 법률사무소에서 후원금조로 매달 지원받는 300만원, 그리고 세비가 주 수입원이다.
당연히 생활비는 의대 교수로 재직하는부인의 몫. 지역구 경조사에 보내는 15,000원짜리 화환, 앨범 등의 외상대금이 2,000만원씩이나 밀려있어 조만간 후원회를 다시 열어야 할형편이라고 했다.
“쟁쟁한 동문들은 두었다가 어디에 쓰려 하느냐”고 했더니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고 면구스러워 했다. 확실히 아직 아마추어의냄새가 난다.
#4 승용차는 ‘밴’
그는 지난해선거운동용으로 구입한 7인승 밴을 지금도 타고 다닌다. 국회에 등원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 때 그를 비롯한 몇몇초선의원들의 밴들이 젊어진 16대 국회의 상징물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 적이 있다.
“이제 그만큼 홍보효과를 봤으면 차를바꾸는 게 어떠냐”고 농을 던졌더니 “누워자기 편하고 작업하기에도 좋다”며 정색을 했다. 흘낏 들여다 본 밴 안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20권 정도의책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5 실망하기엔 이르다?
“386들이 대거 국회에 진입했어도 정작 달라진 게 없지 않느냐”고 ‘독한’ 질문을 했다. “밖에서 친구로 지내던 한나라당 초선의원들과 거의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파당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나중에는 서로 치고 받기도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지요.” 부분적인 동의 끝에 “그래도 아직 몸싸움에 가담한 적은 없다”고 심히 ‘다행’스러워 했다.
“원내부총무인데 날치기 할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민주주의에서는 내용의 정당성과 함께 절차적 정당성도 중요한 것 아니냐.
그런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딱 부러지게 끊었다. “어쨌든 지난 한해는 책무에 비해스스로 너무 갖춘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2년차인 지금부터는 조금씩 달라질 겁니다.”
#6 좋은 정치인보다 더 어려운 좋은 아빠
인터뷰도중 “딸들에게 미안해요”라는 말이 다섯번은 족히 나왔다. 딸들은 한창 자기 만의 세계를 가꿔갈 때인 고교생과 중학생.정치에 입문할 때도 아이들의 감수성만은 절대로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리라 다짐했었다.
“지난해 한 방송사에서 딸들과 함께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길래 냉큼 ‘OK’를 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국회의원 딸로 알려지는 게 싫다’며 항의 하더군요. 아차 싶었습니다.”
그는 이 날도 막내딸의 미술숙제를 위해 건축사인 고교친구에게 ‘청탁’전화를 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통계로 돌아보니
'국회의원은 노는 직업’이라는 고질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16대 국회는 개원 초부터 의욕적으로 ‘상설국회’를 표방하고 나섰다.
실제로 지난해 6월5일 개원이래 올해 4월30일까지 휴회일은 단 9일. 국회법 개정에 따라 매 짝수월에 의무적으로 임시회를 소집한것 외에 끊임없이 ‘방탄국회’가 소집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간 여야 대립으로 회의를 열지못한 이른바 공전일수가 무려139일. 결국 무늬만 상설국회였던 셈이다.
상임위 회의는 전체회의와 소위원회를 합쳐 총 623회 열려 15대(530회)에 비해 17.6% 증가했다. 법사위가 84회로 가장많은 회의를 열었고 정보위가 8회로 가장 적었다. 월 평균으로 보면 본회의 5.4회, 상임위 회의 3.3회 등 한달에 평균 8.7회 꼴로 국회에서회의가 열렸다.
입법활동을 보면 의원발의 364건, 정부제출 208건 등 총 572건의 법안이 발의됐다. 이는 15대 380건에 비해 대폭 증가한것.
그러나 의원발의 법안 처리율이 35.1%에 그친 데 반해 정부제출 법안은 88%가 처리돼 행정부의 입법기능이 더 강화하는 추세를 반영했다.
상임위별 실적으로는 재경위가 총 80건의 각종 안건을 접수해 이 가운데 61건을 처리, 위원 1인당 처리의안건수가 2.7건에 달해 가장 일을 많이 한 상임위가 됐다. 법안 처리율은 과기위가 78%로 가장 높았다.
1년 동안 가장 많은 법안을 발의한 의원은 한나라당 조웅규(曺雄奎) 의원으로 총 19건을 냈고, 같은당 심재철(沈在哲ㆍ15건), 김원웅(金元雄ㆍ10건), 김홍신(金洪信ㆍ10건) 의원 등이뒤를 이었다.
특히 김원웅 의원은 발의 법안 중 2건을 원안 가결시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반면1건의 법안도 발의하지 않은 의원이 무려 128명이나 돼 입법활동이 소수의 ‘공부하는 의원들’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현대건설특혜진상규명 국정조사, 건강보험 재정파탄 국정조사 등 국정조사 요구서도 1년 동안 7건 제출됐다. 이 추세대로라면 국정조사 요구가가장 많았던 15대 국회(23건)를 넘어설 전망이다.
또 한나라당 강삼재(姜三載), 정인봉(鄭寅鳳ㆍ2회) 의원에 대해 체포동의안이 모두3회 제출돼 의원사정이 본격화됐던 15대 국회(12회), 3ㆍ15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문제가 쟁점이었던 4대 국회(6회)에 이어 1년만에 벌써역대 3위에 올랐다.
국회 보좌관 수의 증가와 고학력화 현상도 두드러진 변화. 16대 국회부터 4급 입법보좌관을 한 명 더 쓸 수 있게 됨에 따라 국회사무처에 등록된 4급 보좌관이 15대 293명에서 540명으로 급증했다.
이들 중 박사학위 취득자는 30명이며 현재 박사과정에 있거나 수료한 사람까지 포함시킬 경우는 60명이나 된다. 석사학위 취득자는 무려 107명. 앞서 15대 국회의 박사 보좌관은 8명에 불과했다.
노원명 기자
■시민단체 평가 "구태 여전"
16대 국회 개원 1년에 대한 시민단체의 평가는 한마디로 ‘실망’이다.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컸던 4·13총선을 통해 출범한 국회였기에 기대가 남달랐지만 눈에 띄는 변화를 찾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참여연대 박원순(朴元淳) 사무처장dl 내린 총평은 한마디로 “여전히 절망과 좌절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 그는 “1인 보스중심의 당 구조와 대권 지상주의의 벽이 워낙 높았다”며 “이런구조적 장애물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정치 선진화는 요원하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국회운영만 보더라도 이번 국회들어 예결위 상설화, 표결실명제, 인사청문회 등다양한 제도가 새로 도입됐지만 대부분 실효가 없었다는 지적.
시민사회 단체 연대회의의 ‘16대 국회 1년 평가자료집’에 따르면 예결위는 월 평균 3.6회 열렸을 뿐이고 의원의 정책 책임성을 높이기 위한 투표실명제 실시율은 전체 처리안건의 0.7%에 머물렀다.
가파른 여야대치와 파행국회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책’이 실종되는 구태가 도무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경실련의 송병록(宋炳祿)정치개혁위원장(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도 “국회 운영이나 법안처리 실적 등 모든 면에서 실패한 1년”이라고 혹독한 평가를 내리면서 ▦국가보안법 부패방지법 등 개혁입법의 표류 ▦상시국회의 유명무실화 ▦개혁성향 의원들의 현실 안주경향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는 특히 “이번 국회의 시대적 소명인 개혁입법을 정략과 의원 이기주의 때문에 방치한 일은 두고두고 비판받을 것”이라며 “올 하반기부터 사실상 대선국면에 접어 든다는 점을 감안하면 16대 국회는 이미 그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도 희망을 완전히 버리기엔 국민들이 너무 측은해서 일까. 시민단체들은 여야일부 소장파의 개혁연대 움직임,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의원 연구모임 활성화, 국회출석률 제고 등을 그나마 ‘작은희망의 단서’로 꼽는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적잖은 의원들이 우리에게 인사청문회 등 중요 현안에 대한 자문과 자료를 요청하고 있다”며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과거에 없던 풍토가 생겨나고 있는 것은 의미있는 변화”라고말했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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