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6월20일 프랑스 삼부회의 평민 의원들과 자유주의적 귀족 의원들이 베르사유의 옥내 구희장(球戱場)에 모여 결속을 다짐하고 “국민의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사회의 질서를 회복시킬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않는다”는 취지의 선서를 했다.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한 도화선이 된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다.
그 해 5월5일 루이16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삼부회(성직자ㆍ귀족ㆍ제3신분)를 소집했다.
이 삼부회는 중세적인 신분제 의회의 형식을 답습했으므로, 개회 초부터 신분별 심의와 표결에 반대한 제3신분 의원과 귀족ㆍ성직자로 구성된 특권층 의원들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제3신분이란 프랑스 혁명이전에 주로 도시에 거주했던 평민층(부르주아)을 의미한다.
14세기 초 삼부회가 소집된 이후 국민 대표가 제1부 사제, 제2부 귀족, 제3부 시민의 신분별로 구성된 데서 제3신분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들 제3신분은 이 해의 삼부회에서 성직자ㆍ귀족ㆍ평민의 전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의사를 진행할 것을 주장했지만 특권 의원들의 반대로 합동회의가 열리지 않자, 6월17일 제3신분의원 단독으로 ‘국민의회’라는 명칭을 채용해 영국식 국회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발표했다.
19일 밤 국왕은 성직자ㆍ귀족의 특권층 의원들과개최한 친림회의(親臨會議)에서 제3신분 의원이 결성한 국민의회를 해산하기로 하고 삼부회 회장의 폐쇄를 명했다.
그러나 제3신분 의원들이 테니스코트의결의로 맞서고 성직자 대다수와 일부 귀족이 국민의회에 합류하자, 국왕도 마지못해 3부회 합동회의에 동의했다.
그 뒤 국왕과 궁정 귀족들은 국민의회를해산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지만, 7월14일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고, 국민의회는 프랑스의 의회가 되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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