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 전설이 전하는 울산만 개운포(開雲浦)는 그 옛날 아련했을 안개와 구름대신 공장 굴뚝의 연기만이 자욱했다.온산 석유화학공단에서 내뿜는 뿌연 연무 속에 개운포 앞 처용암(處容岩)도 숨 죽인 거북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개운포를 끼고 있는 울산 황성동 세죽마을은 한때 비경을 자랑하는 어촌이었지만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다.
1970년대부터 들어선 인근 공업단지가 계속 확장되면서 3년 전 마을 주민은 모두 떠나고 잿빛 공장들만이 늘어서 있다.
이런 황량함 속에서 개운포 한가운데 6평 넓이로 모습을 드러낸 작은 바위 처용암만이 천년이 넘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1,100여년 전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ㆍ재위 875~886)이이곳에 놀러 왔다 구름과 안개에 갇혀 길을 잃었다.
왕이 동해 용의 조화 때문이라며 절(망해사ㆍ望海寺)을 짓도록 하자 용이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그 때 왕을 따라 서울(경주)로 간 이가 동해용의 아들 처용이다. 일설에는 처용이 실제로는 신라와 무역을 했던 아라비아 상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현재 전하는 처용의 가면이 코가 높고 얼굴이붉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이국의 신비함을 담은 무역선이 드나들었을 법한 이곳은 이제 거대한 유조선이 드나드는 공장지대로 변해 천년 전의 모습을더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쨌든 처용은 동해 용의 아들로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이후 이야기는 이상한 방향으로꼬여간다. 기와집이 즐비하고 음악과 노래가 그치지 않았다는 태평성대이니 만큼 서울로 간 용의 아들은 한 바탕 태평가라도 부름 직한데 영 그게 아니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마는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김학성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의 ‘한국 고시가의 거시적탐구’에 실린 향가 처용가의 현대어 번역문)
호국의 신, 동해 용의 아들이 불렀다는 노래치고는 기막히다. 다리 둘은 아내것인데, 다른 둘은 누구 것이냐고 익살스럽게 묻는다.
간통을 저지른 아내 앞에서 처용은 체념의 웃음만 짓는다. 한 술 더 떠 춤까지 춘다. 이무슨 해괴함일까.
처용을 둘러싸고 무수한 해석이 난무했다. 역신을 쫓는 무당이라느니, 볼모로 서울에붙잡혀 간 지방 호족이라느니, 신라 하대의 저명한 가면극 배우라는 설에서부터 풍류를 즐기던 화랑 또는 아라비아 상인이라는 설 등등.
처용가를 소개한 삼국유사 ‘처용랑ㆍ망해사’ 편에는 처용과 상관없는듯한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와 춤을 추는 등 왕의 행차나 잔치 때 산신과 지신들이 잇달아 춤을 춘다.
이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경계한 것인데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술과 여색을 즐기다가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슬쩍 덧붙여 있는 이 기사가 처용가를 푸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태평성대의 위기는안에서부터 싹트는 법. 아내의 간통이 상징하는 ‘탐락’(耽樂ㆍ정신이 빠질 정도로 즐김)이 위기의실체이자 망국의 징후였던 것이다.
김학성 교수는 처용가를 “태평성대를 마감하고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고비에호국신인 동해 용의 대리자 처용이 탐락에 빠진 신라인을 교화하고자 한 가요”라고 분석했다.
경고의 방식이 지금 봐도 절묘하다. 노래와 춤이다. 처용은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댄스 가수인 셈인데 탐락을 경계한 행동이 댄스 가요라니…. 헌강왕이 깨닫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간다. 예나 지금이나 춤과 노래는 오히려 향락의 주범으로꼽히지 않는가.
오직 역신(疫神)만이 그 춤의 의미를 알아봤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비애와 고뇌를익살과 춤으로 승화시키는 처용의 몸짓에 역신은 감동한다. 그는 처용의 형상이 있는 집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맹세하고 떠난다.
처용암의 비경이 사라졌듯이 헌강왕이 동해 용을 위해 짓도록 한 망해사도 이제본디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울산 문수산 줄기의 영축산 기슭에 자리한 지금의 망해사는 1957년 폐사의 땅 위에 다시 지어졌다. 주인 없는 부도두 기만이 옛 흔적을 전할 뿐 절 이름과는 달리 동해 바다도 보이지 않는다.
망해사 주지 혜학(惠學) 스님은 “아주날씨가 좋을 때만 바다가 가물가물하게 보였는데 그마저도 지금은 공장 굴뚝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구름과 안개는 굴뚝 연기로 바뀌고 그 속에서 처용암도 망해사도 길을 잃었다.오히려 춤으로 남은 처용무만이 그 옛날 전설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는 지 모른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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