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긴 사슴이 많이 살았다. 높은 산이 두르고 있어 사람의 발길이 뜸했던 때문이다.그래서 마을 이름이 사슴을 닮은 기린(驥麟ㆍ강원 인제군 기린면)이다.그 중에서도 백두대간의 허리춤을 슬슬 파고 들어가 자리잡은 방동ㆍ진동땅은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원시림이 숨쉬는 곳이다.
정감록에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힌 기린곡의 3둔(屯)5가리(원둔, 살둔, 달둔, 젖가리, 연가리, 명지가리, 아침가리, 명가(개)리)가 이 곳에 있다.
무능하거나 포악한 군주를 등진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 살았다. 임진왜란도 6ㆍ25도 모르며 지냈다.
오지여행가들이 애지중지했던 이 곳이 트레킹 코스로 떠오르고 있다. 그 중 부담없는 일정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곳이 아침가리골의 일부와 곰배령. 정말 아름다운 자연이 그 곳에 있다.
#1 아침가리
길은 스스로 희미해지다가 결국 지워졌다. 한 쪽은 발을 집어넣을 수 없을 정도의울창한 숲, 다른 쪽은 시퍼런 계류이다. 어디로 가야 하나.
잠시 두리번거리면 신통하게도 물을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가 보인다. 사람이 놓았을까,아니면 물에 밀려온 것일까. 돌을 뛰어 건너편에 이르면 다시 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아침가리계곡에 드는 것은 길을 찾는 작업이다. 분명 사람이 드나드는 곳인데 발길에다져진 땅이 없다. 철통 같은 원시림은 아직 사람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직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만이 숲 사이로 길을 냈다. 사람은별 수 없이 물길 양 쪽의 돌무더기를 따라 오른다. 돌이 절벽으로 솟구쳐 앞을 막으면 물을 건너가고, 빽빽한 숲에 막히면 다시 건너 온다.
출발지인 갈터에서 목적지인 방동초등학교 조경동분교장(폐교)까지 직선거리는 약3㎞. 그러나 구절양장으로 굽어있어 실제 거리는 7㎞가 넘는다. 길을 잃어 헤매는 거리까지 합치면 10여㎞, 오르는 데만 4시간이 족히 걸린다.
가장 시간을 많이 빼앗는 것은 원형의 자연이다. 이제 신록의 반짝거림에서 막벗어난 수풀은 동공이 시원해질 정도로 짙어졌다.
그 사이로 난 돌길. 세월과 물에 씻긴 돌은 희다 못해 서슬이 퍼렇다. 흰 돌에 올라앉아 숲을머금은 계곡의 물빛은 지상의 색깔이 아니다.
하늘에나 있을 법한 그 푸르름 속에 바람에 넘어진 나무가 드러누워 있다. 열목어, 돌피리, 꺾지…물 속의 요정들이 하느적거린다.
굽이를 돌 때마다 주저앉는다. 다리를 쉬는 것이 아니라 지나칠 수가 없어서다.‘더 오르면 이만한 곳이 있을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내려올 때 또 만날 수 있다는 위안 때문이다.
폐교에 가까워 오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다리와 만난다. 4륜구동차가 다니는큰 길이다. 짧은 일정이라면 여기에서 계곡과 헤어져야 한다.
폐교에는 털보아저씨가 산다. 10마리는 족히 됨직한 개를 키운다. 차를 타지 않고다리품을 팔아 이 곳에 오는 이들을 환영한다. 운이 좋다면 각종 산열매로 담근 진한 술을 얻어 마실 수도 있다.
내려오는 길. 한번 지났던 터라 수월하다. 오르막 경치와 다른 맛이 또 기쁨이다.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가 떠오른다.
주인공이 머물던 환상세계의 3일은 인간세계의3년이라 했다. 아랫마을에 도착하면 훌쩍 세월이 흐른 것만 같다.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아닐까. 변했다면, 이 곳처럼 변했으면 좋겠다.
#2 곰배령
소가 날아갈 정도로 큰 바람이 분다는 쇠나드리분지를 지나면 설피마을이다. 최근몇 년 사이 겨울 여행지로 많이 알려진 곳.
설피는 눈 위를 걷기 위해 신발에 덧대는 일종의 눈신발. 워낙 눈이 많은 곳이어서 아예 마을 이름이됐다.
곰배령 가는 길은 설피마을에서 시작된다. 산 속에 삼거리가 있다. 직진하면 단목령을넘어 양양 땅, 좌회전하면 곰배령을 넘어 인제군 현리에 닿는다.
곰배령 정상까지는 약 4㎞. 오르는 데 1시간 40분, 내려오는 데 1시간20분 걸린다. 가파른 경사나 바위지대가 없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길이다.
아이들은 물론 어르신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처음 약 1.5㎞는경운기 바퀴 자국이 보이는 넓은 길. 산 속에 4가구가 산다.
곰취와 감자를 키우고 산나물을 뜯는다. 드문드문 위치한 농가를 모두 지나면 길의모습이 완전히 바뀐다.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길은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 정도로 좁아진다. 사위는 모두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숲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고사리의 일종으로 거대한 셔틀콕처럼 생긴 꿩고비, 쇠꼬챙이 모양으로군락을 이루며 솟아 오른 속새, 혼절할 듯 향기를 내뿜는 더덕… 영화 ‘주라기 공원’을닮았다. 거대한 공룡이 눈을 부라리며 튀어나올 것 같다.
약 1시간 주라기 공원을 지나면 갑자기 하늘이 보인다. 무성했던 수목의 키가작아지다가 이내 무릎 아래에 도열한다.
정상이다. 곰배령의 정상은 넓은 초원이다. 곰배령은 점봉산과 작은점봉산 사이의 언덕. 언덕이라지만 해발1,100㎙가 넘는다.
백두대간을 넘어 동서로 넘나드는 바람이 지나는 길이다.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한여름에도 바람에 온기를 빼앗겨 이가 부딪힐정도이다.
그래서 키 큰 나무는 자라다가 날아가버리고 야트막한 풀만이 가득하다. 그냥 풀이 아니다. 모두 꽃풀이다. 이제 각종 꽃들이 연이어 피며초원의 색깔을 계속 바꿀 것이다. ‘천상의 화원’이 따로 없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아침가리·곰배령 트레킹가이드
1박 2일의 일정이면 아침가리와 곰배령을 모두 오를 수 있다. 첫 날 일찍 서둘러낮 12시 이전에 진동리에 닿아야 한다.
점심식사 후 곰배령 트레킹. 출발지인 설피마을 삼거리까지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자기 차가 있거나 얻어타야 한다. 방동리로 들어가는 방대교에서 약 26㎞로 꽤 멀다.
16㎞ 아스팔트 포장, 4㎞ 비포장, 다시 4㎞ 포장, 2㎞ 비포장길이이어진다.군데군데 포장이 된 것은 설피마을 인근에 양양양수발전소를 짓고 있기 때문.
삼거리 부근의 휴경지에 차를 세우면 된다. 곰배령 트레킹에는 별다른준비가 필요없다. 그러나 정상의 바람을 막아줄 재킷 정도는 챙기도록. 특히 주의할 것은 길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것. 귀한 풀들이 밟혀 죽는다.
하룻밤을 갈터 인근의 민박에서 묵고 이튿날 아침 일찍 아침가리를 공략한다. 대부분의민박집이 취사도구를 갖추고 있어 아침식사와 간단한 점심거리를 준비할 수 있다.
아침가리 트레킹의 출발지는 갈터 버스정류장이 있는 진동산채가(식당)바로 앞. 지도에는 조양동계곡으로 표기된 곳이 많다.
여울이 소를 이루는 위쪽으로 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다. 폐교까지 대략 4시간여가 걸리지만 길을 잃어 헤매는 시간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오후 2시까지 걸어도 폐교가 보이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발길을 돌려야 한다. 아침가리는물이 낸 바위길이 90% 이상이다. 그래서 비만 오면 미끄러워 위험하다.
폭우일 경우에는 피할 곳이 없다. 꼼짝없이 고립된다. 반드시 긴바지와긴팔셔츠를 입고 등산화, 장갑을 준비해야 한다.
폐교에서 계속 직진하면 조경동약수를 거쳐 홍천군 내면 광원리로 나가는 길. 약6시간 이상을 끈기 있게 걸어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넉넉한 일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반대편은 방동약수를 지나 방동리에 닿는 길. 역시 끝없이계속되는 지루한 오르막이 기다린다.
최근 곰배령과 아침가리를 연계한 트레킹상품도 등장했다. 승우여행사(02-720-8311)등에서 곰배령과 아침가리골 일부를 돌아보는 무박 2일 답사여행을 매주 토요일 밤 10시에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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