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재래식 군비 감축에 대한 북한의태도를 북미관계 정상화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입장을 정함에 따라 한반도 재래식 군축 문제가 북미 및 남북간 뜨거운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군축 문제 해결의 우선 순위, 주체 등을 두고 한미간에 미묘한 입장 차이가 드러나고 있어 향후 한미간 입장 조율이 주목된다.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8일 한미외무장관 회담 후 “(재래식 군축 문제는) 휴전선에 배치된 북한 병력의 규모 때문에 모두가 우려하는 분야”라며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총체적인논의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북한군 병력 및 무기의 감축이나 후방 배치 등 본격적인 군축 차원에서 이 문제를 북미 대화의 의제로 삼겠다는 얘기다.
이런 입장은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의이행선상에서 남북간 해결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우리 정부의 방침과 배치돼 보인다.
특히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협의가 쉬운 긴장완화부터 시작해 군비 감축 문제를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밝힌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정부는 본격적인 군축보다는 긴장완화와 상호신뢰 구축에 우선 순위를 부여하고 있다.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 및 통보▦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군인사 교류 및 정보교환 등 조치의 실행을 통해 기습공격과 무력 충돌을 방지하는 데 군축의 1차적 목표를 두겠다는것이다.
북한의 반발도 거세다. 북한은 8일평양방송 보도를 통해 “미국의 상용 무력 감축론은 우리측 지역에 무방비 상태를 조성, 손쉽게 먹어치우려는 강도적 논리”라고 비난했다. 핵개발은1994년 제네바 핵 합의로 동결되고, 미사일은 발사 유예를 선언한 상황에서 재래식 무기까지 감축하라는 것은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논리다.
이 같은 상황은 재래식 군축 문제가북미대화의 의제로 올려지더라도 단기간에 접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서항(李瑞恒)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선군(先軍) 정치를 펴고있는 북한이 군부의 영향력 감퇴를 가져오게 될 군사력 축소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의 의사에 반대되는 군축정책을 추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향후 북미대화 및남북대화에 미치게 될 영향이다. 정부는 “미국의 입장은 북한 재래식 군비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다는 관심 표명 차원”이라며 “미국이 우리 정부의주도적 역할을 인정하고 있어 이 문제가 북미대화의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측이 타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재래식 감축문제를 북미대화의 중요 의제로 삼겠다고 선언한 데에는 이를 북한과의 핵 및 미사일 협상의 지렛대로 삼겠다는 뜻과 함께 남북간의 급속한 접근을 제어하려는의도가 담겨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승일기자
ksi8101@hk.co.kr
■유럽 재래무기 감축은 18년 신뢰구축의 소산
유럽 국가들의 재래식무기감축 경험은 군사적 신뢰구축에 대한 진전 없이는 군축 협상의 타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다.
유럽 안보동맹의 두축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사뱌조약기구(WTO)는 1990년 각 동맹 23개국이 모두 참여하는 동맹 대 동맹간의 ‘유럽 재래무기 감축협상’(CFE) 을 통해 유럽에서의 냉전을 해체하는 획기적 조치를 일궈냈다.
양 진영의 전력 중 탱크, 대포, 장갑차, 전투기, 공격용 헬기 등5대 공격용 장비의 보유 상한선을 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 각 회원국의 상한선을 배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양 진영은 지역 상한선을 각각 탱크2,000대, 대포 2만문, 장갑 전투차량 3만대, 공격용 헬기 2,000대, 전투기 6,800기로 하기로 했다.
이 조약의 타결은 당시 미하엘 고르바초프 러시아 대통령의 ‘신사고 외교’에 크게 힘입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유럽 국가들간의 18년에 걸친 신뢰구축 노력의 소산이었다.
NATO와 WTO 가맹국들은 1973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472차례의 상호균형감군회의(MBFR)를 한 결과전력 상한선, 철수 병력의 복귀와 재배치 금지 등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이뤘지만 병력 현황 산정과 현장 확인 검증 방법에 대한 이견으로 최종 타결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양측은 협상 과정을 통해 상호신뢰와 협상기술의 축적 등 값진 경험을 쌓음으로써 CFE에서의 무기 감축 타결을 이룰 수 있는토대를 마련했다.
이서항 외교안보연구원교수는 “유럽의 냉전 종식은 정치적 결정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신뢰구축과 군축 노력이 병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이 점은 수 차례의 정치적결정에도 불구, 한반도의 군축 노력이 호전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외교 전문가는 “나토의 일원으로서 군축 협상의 어려움을잘 알고 있는 미국이 재래식 군비 감축 문제를 북미 협상의 주요 의제로 다루겠다는 것은 북한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대화를 진전시킬 의사가 없다는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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