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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워털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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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워털루 전투

입력
2001.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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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6월18일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났다. 그것은 유럽역사의 한 분수령이기도 했다. 이틀 전부터 워털루에서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12만5천 프랑스군이 웰링턴 지휘하의 영국군 9만5천 그리고 블뤼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12만 등 20여만의 연합군과 싸우고 있었다.6월16일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다음 18일 영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으나,또다른 프로이센군의 내원으로 4만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했다. 22일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됐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뒤 유럽에는 이른바 빈 체제가 성립했다. 이 체제의 초석을 놓은 것이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의 처리를 의논한 빈 회의여서 빈 체제라고 부른다. 빈 회의는 프랑스 혁명 직전의 군주들의 지배를 정당하다고 보는 복벽주의와 강대국간 세력 균형의 원칙에 따라 유럽 각국의 영토를 구획하고 옛 지배자들을 부활시켰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주도한 빈 체제의 골격은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4국동맹과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세 군주 사이의 신성동맹이었다. 빈 체제는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완고한 복고 체제였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이겼을 경우의 유럽을 상상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지만,그 경우 유럽의 자유주의나 민주주의가 더 빠른 속도로 자라났을 것은 분명하다.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의 기묘한 점은 그가 전제 군주이자 정복자였으면서도,한편으로 자유주의와 혁명 사상의 전파자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비록 프랑스 혁명을 탈취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자식이기도 했다는 뜻이다.이 절대 군주는 유럽의 다른 절대 군주들의 적이었고, 이 정복자는 해방자이기도 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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