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도처에 말은 흘러넘치지만 가슴에 새길 말을 찾기는 힘들다. 글은 진리를 드러내기보다는오히려 감추는 방편으로 이용되기 일쑤다.
꿈을 일상으로 만들어주는 진짜 말과 글보다는, 일상을 꿈으로 분식하는 가짜 언어가 판을 치는 시대다.말과 글에서 진정한 성찰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민음사가 계간 ‘세계의 문학’ 100호를 기념해 기획한 대담집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는우리 사회의 지도적인 지성, 이제 막 그 분야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젊은 인물 26명이 가진 13회의 대담을 모은책이다.
아버지와 딸도 있고, 수십년 지기도 다시 만났고, 스님과 목사도 한 자리에 앉았다. 이들은 알맹이 없는 논쟁이 아니라 일상의 애환을 이야기하는데서부터한국사회ㆍ문화의 현안을 짚어내는 진솔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드물게 보는 말의 향연이다.
책의 제목이 궁금하다. 소설가이자 신화연구가인 이윤기씨는 철학과에 다니는 딸다희양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는 어쩌다 이런 ‘돈 안 되는 인문학’에 빠져드셨어요?”
딸의 질문에 이씨는 대답했다. “그러는너는 왜 철학과 갔냐? 그리고 ‘돈 안 되는 인문학’이라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돈이 안 된다면 내가, 도둑질했단 말이냐?”
부녀 대화는 이렇게 단도직입으로 이어졌다. 책의 제목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는 우리 전래 무가(巫歌)본풀이에 나오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우리 아버지 배를 타고 한강수에 놀러갔다/ 봄이 오면오시겠지?/ 봄이 와도 안 오신다…’로 이어지는 이 노래를 들려주며 이씨는 “지금은 눈물 없이불러낼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들은 우리 신화가 묻혀 있는 이 무가야말로 내 신화 연구의 힘”이라고털어놓는다.
대담자들은 그대로 현재 우리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면면들이다. 김춘수, 김우창,김화영, 최인호, 이문열, 이승훈씨 등 쟁쟁한 문인들이 보인다.
생물학자 최재천, 음악학자 이강숙, 정치학자 최장집, 풍수학자 최장조, 동양학자정재서 교수는 각각 시인 최승호, 화가 김병종, 철학자 강유원, 철학자 탁석산, 커뮤니케이션학자 김주환씨와 대담했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교수는 아줌마 페미니스트 이숙경씨와 만났고, 인터넷서점 알라딘 대표 조유식씨와 헌책방 ‘숨어있는 책’ 주인 노동환씨도 마주앉았다. 도법 스님은 이화여대교수 양명수 목사와 지리산 실상사에서 새벽부터 대화를 나누었다.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와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흉허물없이 털어놓으면서 이들의대화는 수다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다가도 깊이 있는 철학적 주제, 혹은 한국 사회의 핵심적 문제들로 접근했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와 시인 최승호씨는생명과 죽음을 끌어안는 선(禪)적 일치로 나아갔다. 고교 선후배인 최장조 교수와 탁석산 교수는 “사람은 땅을 닮고땅은 사람을 닮는다”며 진정한 ‘우리 것’의 의미를 되새겼다.
고교 동창생인 소설가 최인호씨와윤윤수 휠라코리아 사장은 돈이란 무엇인가를 토론하며 한국경제의 문제를 통렬히 비판했다.
김우창 교수는 젊은 철학자 김상환 서울대교수와 만나 오렌지주스에 대한 이야기로20세기 한국문화를 돌아보았다.
난생 처음 오렌지 주스를 마셔 본 어느 교수가 그것을 하늘나라 음식을 먹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한 일화에서, 이들은“우리가 지난 20세기 내내 서양 것을 온통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이 아닐까?” 질문하며 우리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강조했다.
‘더 멀리 더 깊이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에대해 이야기를 나눈 도법 스님과 양명수 목사의 만남은 이 대담집에서 일관되는 주제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성찰이다.반성 없이 앞으로만 치닫고 있는 우리의 삶, 이념의 과잉 시대를 지나 이제는 욕망의 과잉 시대를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성이다.
생산적인 대화,살아있는 말의 전범을 이 책은 생생한 현장성이 엿보이는 90여 장의 사진과 함께 보여준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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