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5년 6월15일, 영국왕 존이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을 승인했다.봉건적 권리의 분배를 놓고 존왕과 갈등을 빚던 귀족들은 이 날 템스강 남쪽 기슭의 러니미드 초원에서 왕을 협박해 이 문서를 승인하도록 했다.
귀족들이 져야 할 봉건적 부담의 제한과 교회의 자유, 도시 특권의 확인 등이 이 문서의 내용을 이룬다.
흔히 대헌장을 근대 민주주의의 시원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 문서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인 여섯 가운데 다섯은 농노였는데, 그들에게 이 문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자유민들에게도재판 청구권 등 극히 제한적인 의미만 있었다.
요컨대 이 문서는 귀족의, 귀족을 위한, 귀족을 위한 문서였다.
그러나 이 문서는 17세기 들어국왕과 의회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가장 듬직한 전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 대납금이나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헌장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는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됐고, 자유민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ㆍ구금할 수 없다고 규정한 제39조는 보통법 재판소에서의 재판을 요구하는 근거로 이용됐다.
존왕은 무능한 군주였다. 형인 리처드1세의 왕위 계승권자인 조카 아서를 살해하고 왕이 된 그는 자신의 왕위 계승과 관련해 일어난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의 전쟁에서 패해 프랑스 안에 있던 영국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또 캔터베리대주교 선임 문제로 교황 이노센트3세와 맞섰다가 파문을 당하고 왕위를 박탈당한 끝에 잉글랜드의 전 국토를 교황에게 헌상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무능함 덕분에 근대 헌법의 밑받침이라는 대헌장이 탄생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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