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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일교류 좌담회 / '文의 전통과 武의 전통-닮았지만 다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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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일교류 좌담회 / '文의 전통과 武의 전통-닮았지만 다른것'

입력
2001.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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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사와 요미우리(讀賣)신문사가 공동주최하는 한일 교류좌담회 4번째 행사가 ‘문(文)의 전통 무(武)의 전통-닮았지만 다른 것’을 주제로 2~4일 경주 현대호텔에서 열렸다.참석자들은 좌담회에서 고대에 한 뿌리였던 양국의 문화가각각 다르게 발전해간 과정과 양상을 살피고 교과서문제등 현재의 문제까지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文의 나라, 武의 나라

△이어령=한국은 문(文)의 나라, 일본은 무(武)의 나라로 인식돼 왔고, 흔히 붓과 칼에 비유돼 왔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무’ 속에도 문의 전통이 스며 있으며 일본 무사도에는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 한국에서선비 얘기를 합니다만 신라의 화랑은 문무를 겸비한, 어느 의미에서는 무인집단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서로 문이다 무다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학(大學) 논어(論語)에 나오는 士(사)자는 문사(文士)나 무사(武士) 모두에 쓰입니다. 대학의 표현을 볼 때 문사 무사는 모두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 완성된 인간형입니다.

중용을 중시한 유교에서는 문무 겸비를 지향했고, 어느 한 쪽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문의 전통을 이야기할때 선비정신, 일본에서는 무의 전통을 이야기할 때 무사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편의상 나누겠습니다.

경주는 불교를 중심으로 조선의 선비에 이르는 긴길목에서 한국 문사문화의 대표적인, 그러면서 무를 잘 융합한 문무겸비의 땅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문의 전통과 무의 전통이 각자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다른 문화를 꽃피웠는가를 이야기해 봅시다.

△최병헌=11세기 전반기 사람인 북송(北宋)의 대표적 관료 구양수(歐陽修ㆍ1007~1072)는 일본도가(日本刀歌)에서 일본의 칼을 신품(神品)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무의 전통에따라 일본에서는 칼이 공예품으로 크게 발전해 북송에도 수출됩니다. 고려문인들은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등을 대단히 숭배했지만 일본에서는헤이안(平安)기 후반 가마쿠라(鎌倉)시기에 소동파의 시가 주목되거나 언급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의 무의 전통은 가마쿠라시기 이전까지도올라가지 않나 생각됩니다. 또 일본의 가마쿠라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 무인집권기는 한국에선 드물게 무인이 100년 가까이 집권한 시기입니다.

그때 무인집정관이었던 최우(崔瑀)에게 대표적 불교 승려였던 혜심(慧諶) 스님이 화두(話頭)를 참구(參究:불교에서 참선하고 연구함)하라 고 편지를 보낸 일이 있습니다.

혜심은 간화선(看話禪:화두를 갖고 참선함)을 권하면서 화두를 붓으로 줍니다. 같은 무인집정기라도 가마쿠라시대와 고려시대의문과 무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이어령=일본에서 칼이 발달했다고 했는데 한국에서는신라때 우수한 야금술로 세계 최대로 불리우는 봉덕사신종, 즉 에밀레종을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야금술에서 앞섰는데도칼에서는 일본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칼과 붓의 문제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일본에 무사도가 형성된 것은 보통12, 13세기라고 하는데 무사도 형성 이전, 한국에 과거제도나 유교가 뿌리내리기 전에 양국은 불교라는 같은 종교를 공유했지만 불교도 다른 양상으로발전하지 않았습니까.

△최병헌=한국불교의 특색으로는 회통(會通)불교, 호국(護國)불교, 무불습합(巫佛褶合)의 불교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일본불교의 특색으로는 진호국가(鎭護國家), 대승불교(大乘佛敎), 원돈삼학(圓頓三學), 진속일관(眞俗一貫), 즉신성불(卽身成佛), 본지수적(本地垂迹)등 6가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중국에서 성립된 각 학파의 불교를 받아들여 통합불교를 성립시켰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종파의 분립은 있었으나 대립을 극복해 선교통합(禪敎統合)을이루었고, 마침내 조선시대에 선종(禪宗)으로 통합됐습니다.

일본불교는 상대적으로 종파성이 강해 나라(奈良)시대의 남도육종(南都六宗:法相宗 三論宗 俱舍宗 成實宗華嚴宗 律宗)등 수많은 종파가 분열을 거듭해왔습니다.

또 종파마다 염불이면 염불, 선이면 선에 전념하면서 다른 요소는 배격합니다. 이런 종파적 경향은 한국불교의 회통적인성격과 확실히 구별됩니다.

한국의 중앙집권적인 사회와 통일성의 문화, 일본의 지방분권적인 사회와 분산적인 문화가 대비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불교의 호국적 성격과 일본불교의 진호국가설도 불교의 국가주의적 성향을 나타내는 공통된 특색이지만, 일본불교가 국가주의적 성격이 더 두드러집니다.

이런 성향은 메이지(明治)시대에 절정을 이루어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의 일치를 주장하는 국가주의적 불교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또고려 지눌(知訥:ㆍ1158~1210)의 조계종(曹溪宗)과 일본 에이세이(榮西ㆍ1141~1215)의 임제종(臨濟宗), 도겐(道元ㆍ1200~1253)의 조동종(曹洞宗)을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도겐은 문필로 진리를 표현하는 자세에 비판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겐의 조동종은 좌선만을 내세웠습니다.

그 결과 무사들의 단순직절(單純直截)한 성격에 선(禪)이 쉽게 연결될 수 있었고, 무사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는 불교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우메하라=일본은 중국에서는 주변적이었던 종교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키고 이어왔습니다. 한국에 없는 것은 정토종입니다.

이것은 7세기에 일어났던 것을 법연(法然)이 13세기에 재흥시킨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만 입 속에서 되뇌면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지요.

불교 전체를 나무아미타불이라는말에 집약했어요. 난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불경 이름을 말하면 모두 구제를받는다고도 했어요.

△이어령=한국문화는 형태가 없고 관념적이며 철학적이고 내적인 성격을 띠는 반면 일본은 틀이 있고 쉽고 명료하고 물질적인 성격이 강해 불교에서도추상성과 구상성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과 삶에 대한 의식차이

△우메야마=조선왕조의문화를 살펴 보면 주자학을 받들면서 대의명분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는 자세가 두드러집니다. 왕보다는 진리나 이념에대해 충의를 다하면서 순(殉)한다는 자세입니다.

일본에선 16세기 때 규슈(九州)의 사가(佐賀)에 살던 야마모토 쓰네도모(山本常朝)가 ‘하가쿠레(葉隱)’라는 책에서 “무사도는 곧 죽음을 찾는 것”이라고 갈파합니다. “죽음이냐 삶이냐를 택해야 하는 국면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죽음을 택하라. 그러면틀림이 없다”는 말도 합니다.

순사는 어떤 주군이라도,설사 암군(暗君)이라도 따라서 죽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에 순사의 풍습이 있는지 조사해 봤는데 없는 것같습니다.

순사가 너무 많자 에도바쿠후에 이르러순사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지금도 인기높은 대중연극 가부키(歌舞伎)에는 주군의 아들 대신 자기 아들을죽이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정양모=한국에서 부모상을 당했을 때 3년 시묘(侍墓)를 하는 것은 묘막(墓幕)을 짓고 3년간 곡기(穀氣)를 끊고 겨우 사는 정도로만 먹는 것인데, 오히려 더 인내해서 오래오래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편이 죽으면따라 죽는 것이 아니라 단지(斷指)를 해서 그 피를 부모나 자식에게먹이는 것도 죽는 개념이 아니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개념일 것입니다.

△이어령=한국은 죽음을 미화하거나 찬미하지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의리는 있지만, 주군이 죽었으니 따라 죽는다는 순사가 제도화되거나 찬미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충의에 비해 효를중시한 점도 순사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칼의 세계는 매우 구체적이지만 문의 세계는 추상적입니다.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이념적이죠.죽음에 대한 문제도 일본은 형식화ㆍ양식화하지만 한국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자연관과 조형예술의 상관관계

△정양모=도자기를 중심으로 살펴 보면 일본중국 한국은 같은 동양권이지만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일본과 중국은 자연과 인간이 대립합니다.

한국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여깁니다.BC 4500년~BC 6000년의 세 나라 토기를 비교하면 일본의 조몬(繩文)토기에는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이 화려한 장식적 요소로 나타납니다.

중국에서는 색깔이 화려한 채문토기가 생깁니다. 하지만 한국은 단순히 음각을 한 빗살무늬토기와요즘 말하면 양각(陽刻)이라는 띠를 둘러서 표현한 것으로나타났습니다.

백자의 경우 한국은 중국과 가까운데도중국에 엄청나게 많은 전형적인 삼채(三彩)는 한 점도 없습니다.

단지 이채(二彩)라고 볼 수 있는 것이 통일신라때 만들어졌는데 열 손가락 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청자도 한국은 12세기 전반에 산화동(酸化銅)으로 붉은 색을 나타내는 것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미즈오=각국의 조형미술을 비교하면 중국과 일본은 꽤 확실한 차이가 파악됩니다. 중국은 형(形)입니다.

매우 대칭적인 형을 갖고있습니다. 일본은 무늬랄까, 색이랄까, 그런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대칭적입니다.

한국은 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부드럽고,흐르는 듯한 선입니다. 중국사람의 미의식으로 볼 때 바람직한 게 아니지만 일본인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입니다.

미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면 무상관(無常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국인에게는 어디까지나 확고하고, 대지에 발을 확실히 디디고 있는 것이중요합니다.

일본인은 어딘지 확실한 것보다는 옮겨가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한국인에게도 그런 미의식이 있는 게 아닐까요.

△정양모=한국 미학에서 지고한 것은 자연과 똑같은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인위적인 것을 넣았고 전체가 어우러져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말기 백과전서인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보면 ‘고려청자가 원래 유명하지만 조선백자는 결백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림을 그리면 안한 것만 못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국은 자연을 따른 데 반해, 일본은 인위적인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의식을가졌던 것입니다.

△미즈오=일본 도자기의 특색은 한 마디로 장식기술이 성했다는점입니다. 이로에(色繪)라고 해서 색을 칠하고 무늬를 디자인하는것이지요.

회화적 성격은 일본 조형미술의 큰 특징으로 장식성이 강하다는 말도 됩니다. 무늬가 없는 도자기를 높이 치는 미학도 있었습니다.

그것은다도(茶道)를 기초로 발전해온 미의식입니다. 다도가 발달한 것은무로마치(室町)시대, 15세기말경입니다.

일본 다도의 특색은 차의맛에 따라 종교적, 철학적 의미를 찾는다는 것과 차를 마시는 도구류가 매우 세련됐다는 점인데 다른 민족에는 없는 특징입니다.

고려에서 조선시대에걸쳐 건너온 다기에는 이도(井戶)고비키(粉引)고모가이(熊川)토토야(魚屋) 등 여러 명칭이 붙습니다. 이중 최고는 이도였습니다.

현재 일본에 있는 이도 가운데 기자에몬(喜左衛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메이부쓰(大名物)로 부르는 다기 명품 중에서도 으뜸입니다.

하지만 이는 아마도 한국에서는 대량 생산되는 싸구려 제품이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깎아내지 않은데다 끝마무리도 하지 않았어요.

이런그릇에서 미를 발견한 것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소위 민예(民藝)운동입니다. 야나기는 민중이 사용하는 실용품, 잡기(雜器)에아름다움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령=중국은 형, 일본의 색채,한국의 선으로 구분하는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씨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또 일본의 셋슈토요(雪舟等楊)가 그린 달마도(達磨圖)와 조선조때 일본에 통신사일행으로갔던 김명국(金明國)이 그린 달마도를 비교하면 금방차이가 드러납니다.

셋슈의 달마도는 눈을 크게 뜨고 금방 달려들 것 같은 무사같은 표정인데 김명국의 달마도는 둥글둥글하고 부드럽습니다.

△미즈오=한국과 일본 미의식의 공통점은 자연과의 공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는대칭이 없습니다. 전부 비대칭입니다. 때문에 조형물도 비대칭이 됩니다.

그것이 자연에 맞는 것이며,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감각적으로 동조하게 되는것입니다. 다만 일본인들은 아름다운 물건을 손에 넣으면 나름대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강하지요. 불상도 일본의 불상으로 변해갑니다.

△최병헌=불상의 재료는 확실히 서로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초기에 청동으로 만드는 것이 유행했고 9세기 이후 철불이 한때 유행했습니다.

후대에 가면 소조불(塑彫佛)이 만들어집니다. 일본에서는 목불이 발달합니다. 백제나 신라에서 청동불상이 일본에 전래되면, 모양은따르지만 목조로 바뀝니다.

일본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반가사유상이 대표적입니다. 탑도 중국이 전탑(塼塔)의 나라, 한국이 석탑(石塔)의 나라라면일본은 목탑(木塔)의 나라입니다.

또 고려불화는 색채와 선의 섬세함이 돋보이는데 일본에서는 고려불화를 중시하면서도 이상하게 고려불화같은 것을 볼 수 없습니다. 헤이안기 이후의 일본불상을 보면, 무사적 형태를 보이는 것같습니다.

△우메하라=한국과 일본불상의 결정적 차이는일본불상은 헤이안시대에 들어오면 거의 대부분 목조불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명한 차이입니다.

한국에는 철불상이 많지만 일본에는 철불상이거의 없습니다. 철로 만든 불상을 보면 일본사람들은 큰 위화감을 느끼게 되지요.

△미즈오=일본엔 다양한 나무가 있는데다 성장도 빠르고 조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신이 살고 있다는 애니미즘적 신앙이 있는데 나무에 불상이나신상을 조각함으로써 그것을 형상화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에 목불이 많은 이유입니다.

◆교과서문제와 상호이해의 길

△이어령=문의 전통, 무의 전통은 현대에 이르러 다른 정치적 이유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무사도를 군국주의와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름답고, 깨끗하게 꽃이 지는 까닭에 미학적으로 찬미된 벚꽃을 일본제국주의는군국주의이념으로 왜곡시켰습니다.

‘사람은무사여야 한다’ ‘사쿠라가 아니면 꽃이 아니다’라면서전쟁과 죽음을 찬미하면서 왜곡합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살아가며 연대해야할 아시아인데, 대동아공영권 재편과 같은 사고방식을 부활시킨다면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우려인 것입니다. 그것은 교과서의 몇 개 부분을 수정하지 않는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메하라=나는 일본교과서 문제,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문제, 헌법 개정문제에 모두 반대합니다.

나는 야스쿠니 신도(神道)가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난 신도와 다르며, 유럽 국가주의에 의해 왜곡된 신도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일본의 신도는 원래 전쟁을 일으킨사람보다 전쟁으로 인해 피해당한 사람들을 제사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야스쿠니를 참배한다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후 교과서는 다소 편향됐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고대 일본신화를가르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번 교과서문제는 자민당 일부 정치인과 일부 학자가 결탁해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을 만들지 않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일본문화에 대해 빗장을 풀고 있고, 내년 월드컵대회 공동개최를 계기로 양국 관계가 호전되려 하는 때에 그처럼 조심성없는일을 한 것은 일본의 책임입니다.

일본이 문화의 공통성을 자각, 문화적인 기초를 토대로 경제적으로 공영하는 동아시아연합체와 같은 목표를 갖고 나가면서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면 한일관계가 더욱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메야마=일본에서 바쿠후(幕府)는 방어를 위해 다리를 놓지 않았지만 조선통신사가 지나갈때면 80척, 100척의 배를 줄지어 세워 후나바시(舟橋)를 만들었습니다.

다이묘(大名)의 행렬이 지날 때도 그런 다리는 없었습니다. 통신(通信)이라는단어는 이제 일상어가 됐지만 서로 신뢰를 주고 받는다는 의미는 남아 있습니다.

△미즈오=저는 지금껏 한국을 공부해왔지만 실제 현지에서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나누면서 책을 통한 이해는 역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의가 통하는, 그 옛날의 통신사가 된 듯한 기분입니다. 신의를 나누고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여 가고 싶습니다.

△정양모=양국이 똑같은 문화를 갖고 있다면 재미가 없겠지요.일본의 사무라이문화에도 선비정신과 같은 점이 있고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계승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곳에서 새로운 것들이 생겨난다고봅니다.

△최병헌=우리들은 일본교과서 내용 중 한일관계만문제삼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다음세대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일본 내 양심적인 지식인들도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극우인사들이 만들어낸 교과서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일본 대부분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우리와 생각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어령=원래아시아에는 이질적인 것을 결합하고 조화시키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대와 집단에 따라 무를 더 숭상하는문화와 문을 더 숭상하는 문화가, 같은 뿌리에서 두 가지 색깔의 꽃이 피어나듯 발전했습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창조적 에너지가 된다는것이 오늘 말씀의 골자인 것 같습니다. 독자들은 일본에도 양식있는 학자, 한국을 잘 이해하는 지식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커다란수확입니다.

■한국 도자기 심취했던 두 日 人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ㆍ1889~1961):도쿄제국대철학과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1916년 친구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의 권유로 조선을 방문하면서 한국 도자기에 매료됐다.

그 때 만난 노리다카의동생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와 함께 조선공예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1924년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

1920년대 초에는총독부의 광화문 철거방침에 맞서 ‘사라지려하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라는 신문기고를 통해 광화문을 지켜냈다. 조선 민속그림에 민화(民畵)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는 ‘조선과 그 예술’(1922)이라는 저서 등을 통해 “조선의 미는 애상(哀傷)의 미”라는‘비애의 미’ 이론을 펴 우리 학자들로부터 식민사관이라는 비판을받았다. 그러나 1930년 이후 ‘단순화로의 복귀’ ‘자연에대한 무심한 신뢰’ 등으로 표현한 점을 근거로 초기 오류만 보지 말고 전체를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농고졸업후 1914년 형의 권유로 조선에 와 조선총독부 산림과와 임업시험장에서 일했다.

형의 도자기 연구를 돕다 조선 도자기에 빠져 전국의 가마터를돌아다녔고 ‘조선도자명고’라는 명저를 냈다.

한옥에서 한복을 입고 살았던 그는조선의 혼과 역사를 말살하려는 일제를 격렬히 비난하고 조선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장례는 유언대로 조선식으로, 조선인에 의해 치러졌다. 망우리묘지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는비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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