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멕시코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은 유럽축구의 벽을 뼈저리게 느낀 한판이었다.당시 한국은 일본, 호주와 예선을 치렀다. 한국은 62년 자카르타대회에서 일본을 1-0으로 이긴 이후 한번도 꺾은 적이 없어 승리에 목말라 있었다.일본은 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는 등 실력이 상당했다. 1차전은 2-2로 비겼지만 2차전서는 정강지의 2골로 일본에 승리하는 감격을 누렸다. 경기를 관전했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체력과 투지가 부족해. 훈련을 다시 시켜야겠어”라고 실망감을 표시했다는 말이 선수단에 전해지자 모두들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장벽은 호주였다. 정부는 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의 8강 진출에 자극받아양지팀과 일부 대표선수를 한국축구 사상 최초로 유럽원정을 보내는 등 축구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았다. 1차전은 1-2로 한국의 패배였다.
김호와 콤비로 아시아최고 수비수로 이름을 날리던 나는 69년10월 20일 월드컵본선 티켓을 놓고 호주와 마지막 승부를 펼쳐야 했다. 2차전서 호주를 이겨야 재경기를 통해 본선티켓을 기대할 수 있는 절박한 입장이었다. 호주의 공격을 잘 막아내며 전반 박수일의 선제골로 승리가 보이는 듯 했으나 후반들어 한 골을 내주어 결국 탈락했다.
나는 수비수로 책임을 통감했지만 후반에 얻은 페널티킥을 임국찬이 실축, 재경기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그뒤 86년 대표팀감독으로 멕시코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았다. 비록 호주에 패했지만 경기내용은 괜찮았다. 국제교류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경험부족을절감했다.
당시만해도 축구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70년대이후 고교야구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갈 때는 축구인으로 가슴이 아팠다. 70년 멕시코월드컵을 TV로 지켜보면서 아쉬움을 떠나 한국축구가 ‘세계수준과 거리가 먼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의 머리에는 54년 스위스월드컵 참패 기억만 떠올랐고, 과연 내가 월드컵본선에 나가 잘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당시 일본은 외국지도자를 영입했고, 대표선수들은 175㎝이상만 뽑는 등 유럽벽을 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오늘날 일본축구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정리=여동은기자
●약력
김정남(58)씨 64~72년 국가대표선수를 지냈고 고려대감독, 유공감독을 거쳐86년 멕시코월드컵 한국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지난해부터 울산현대 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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