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는 무엇인가 비밀을 간직한 실체인 양, 그 단어 자체가 특별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이 지명은 흔히 혹독한 자연조건, 숙명에 내몰린 인간, 그리고 그의 고독한 결단이 풍기는 칼날처럼 비장한 분위기를연상케 한다. 곧 시베리아는 사람들 뇌리에 ‘유배의 땅’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시베리아는 원래 유배의 땅이 아니었다. 러시아 전체 면적의 약 4분의 3을 차지하며,중국이나 미국의 전체 면적보다 훨씬넓은(약 1,300만㎢)이 땅에는 투르크(야쿠트, 시베리아 타타르),퉁구스(에벤키) 피노-위구르(칸티,만시) 몽골(부랴트)등 아시아계 부족들이 흩어져 살고있었다. 이들은 주로 수렵, 유목생활에 종사하고 샤머니즘을 신봉하였다.
시베리아를 러시아어로는 시비르라 하는데, 이는 원래 시베리아 타타르인의 한국(汗國)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가난하되 평등하며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살던 이 시베리아를러시아인들이 정복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말부터였다. 그 초기의 주역이 스트로가노프 가문과 예르막 티모페예비치이다.
러시아는 금장한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그 후속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했는데 우랄산맥 서쪽의 카잔한국이러시아 영토가 된 것은 1556년이다.
그러나 인근 지역의 일부세력은 저항을 계속했다. 즉 카잔의 정복 후 우랄산맥 동쪽 서부 시베리아의 강자이던 시비르한국의 통치자 에디게르는 차르에게 자발적으로조공을 바쳤지만 그 후계자인 쿠춤은 오히려 군대를 보내 러시아 영토를 공격했다.
그로 인해 큰 피해를 보게 된 것이 스트로가노프 가문이었다. 이들은 당시 북동부 러시아에서 염전업, 광산운영, 모피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노브고로드 출신의 상인기업가 집안이다.
이 가문은 대공-차르들이 재정난에 부딪칠 때마다 거액의 돈을 빌려주는 등모스크바 중앙권력에 긴밀히 협조했고,그 대가로 면세특허권을 얻어 사업영역과 영지를 넓혀갔다.
그 영지는 우랄산맥 일대에 널리 퍼져있었는데, 독자적 행정조직과 사법적 특권까지 구비하였으므로 중앙권력에대해 일종의‘가신국가’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 집안은 위구르인들을 비롯한 이민족의 잦은 습격에 대항코자요새시설을 갖춘 도시를 건설하였고 때로는 그들이 먼저 이민족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서 시비르한국의 공격을 받자 스트로가노프 가문은아예 시비르한국을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었다.그러나 가문의 휘하에 있는 것은농민들뿐, 숙련된 전사가 없었다.
동남부 초원지대의 카자키 두목(아타만)인 예르막이 주목받은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카자키는 중앙정부의 속박을 피해 러시아변경으로 달아난 개척자, 탈주농민 등으로 구성된 특수한 집단이다.
러시아 민요에서는 예르막이 투르크 술탄의 감옥에 갇힌적도 있고 카잔한국의 정복에서도 활약했다지만 그는 실제로는 볼가강과 돈강을 오르내리며 노략질하는 해적이었다.
당시 그는 차르 이반 4세와관련된 상인을 습격했다가 차르의 노여움을 사 처벌받을 위기에 놓여있었다.
바로 이 때 스트로가노프 가문이 ‘명예로운 봉사를 하도록’ 그를 불러들인 후, 무기와 전비를 지급할 테니 시비르한국을 정벌하라고 제의했다. 예르막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1582년,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은 막이 올랐다.
예르막은 카자키 무리를 이끌고 우랄산맥을 넘어가 이르트이쉬강을오르내리며 시비르한국을 공격했다.
그의 부대는 대포와 화승총으로 무장하였으니, 활과 화살이 고작인 쿠춤 군대가 대적할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인들은 1586년 투라강변, 옛 시비르한국 수도의 자리에 시베리아 최초의 러시아 도시인 튜멘을 건설하였다.
예르막은 1585년 쿠춤부대와의 후속전투에서 사망했는데,거친 싸움꾼에 불과했을 그가 러시아민요나 애국주의적 러시아 사학에서는 차르와 러시아 민족을 위해 이민족을 정복한 애국자로 영웅시되고 있다.
비적들을 고용했다고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대해 격노했던 차르정부는예르막의 승전보에 환호했을 뿐 아니라,그 후로는 본격적인 시베리아 정복을주도해 갔다.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탐낸 것은 무엇보다도, 이 곳이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있던 아주 값진 담비와흑담비의 산지였기 때문이다.
북미 대륙(특히 캐나다)에서 고급모피동물이 멸종되자 시베리아의 중요성은 그만큼더 커졌다. 러시아인들은 토착민들에게 냄비, 술 등 싸구려 물품을 주는 대가로 모피를 얻기도 했지만, 이들을 정복한 후 차르에게 조공(야삭)으로 모피를 바치라고 강요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
유럽의 모피 수요가 늘어날수록 시베리아에서의 모피동물 남획도 심해졌고 모피동물을 찾는 러시아인의 행렬은 점점더 동쪽으로 나아갔다.
1638년에는 러시아원정대가 마침내태평양 연안(오호츠크해 연안)에까지 이르렀다. 시베리아 정복과 탐사는 그 후로도 계속되어 18세기에는 전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지배권 아래 들어왔다.
러시아인들은 도시를 세우고, 정교회를 건설하고 유럽지역 농민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했다. 그리고 기후조건이 좋지 않은 이 곳은 유형의 장소로 선택되었다.
유배로 치면, 제정시대의 러시아인 정치범이나 범죄자들만 시베리아에서 유배생활을 한 게 아니다. 토착민들도 러시아에 정복당한 후로는 바로 자기의 땅에서유배자의 운명을 살게 되었다.
시베리아 최초의 러시아 도시 튜멘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있을까. 지난해 7월 이곳을 찾았던 역사에세이팀은 러시아인 지배의 현실과 더불어 타타르인 거주의 역사적 흔적 또한 살펴보려 했으나 그 희망은 튜멘 국립박물관에서도, 튜멘대학 박물관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시에 쳐들어간 외국 방문객들을 위해 한 시간 이상이나인근의 타타르인들을 탐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튜멘대학 역사학부장 콘드라티예프 교수 덕에 버스를 타고 튜멘시내를 벗어나 30분 이상을 달려가서 가까스로 찾아낸 곳이 얀바예보 마을이었다.
그렇듯,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동서의 교류가 아니라 일방적 정복과 지배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백인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정과 비슷하다.
다만, 북미대륙과 비교한다면 토착민의 물리적 박멸, 문화적 소멸이 그렇게까지 철저하지는 않았고, 러시아인과 토착민의 통혼을 통한 인종적 혼합의 성격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시베리아는 유라시아 국가인 러시아에서 아시아 부분을대표한다.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시아 문명과 조우했던 러시아는시베리아를 지배함으로써 아시아 문화를 불가분의 일부로 포함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베리아는 횡단철도를 통해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로 연결하는 교통망의 주역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 때에는 알까. 이 곳에서 백인들 손에 희생당해 갔던 토착민들의 삶과 문화를기리는 마음들도 늘어날 것임을.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교수
후원 삼성전자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튜멘 몽골인 마을 얀바예보
우리일행이 지난해 7월 얀바예보마을을 찾은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약속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튜멘대학 콘드라티예프교수를 무작정 찾아가튜멘의 역사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친절하게도 이런 저런 설명을 하던 중 몽골인 마을 얀바예보를 소개해주었다.
튜멘동북쪽 17㎞ 지점에 있는 이 마을은 야트막한 야산 사이로 평지가 펼쳐져 있어 겉으로는 우리나라의 여느 농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주업은 농사와목축. 마을 입구 밭에서는 탐스러운 배추가 자라고 있었고 마을 안에서는 젖소들이 햇볕을 피해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들른 낮 시간대에는들로 주민들이 들로 일하러 나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인기척이 있는 곳은 보수중인 마을의 이슬람 사원 부근이었다. 시멘트 더미가 쌓인 사원 앞에서 아이들은 장난을 치다가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는 깔깔웃고 손을 흔들었다.
사원 부근에 있는 몽골타타르역사박물관의 비키 치미라바 베네라 아지아프트나(71) 관장은 “마을에 외국 사람이 찾아온 적이거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신기해 한다”고 일러주었다.
몽골타타르역사박물관은 말이 박물관이지 마을에 있는 조그만 기념관 같은 곳이다. 주전자나옷가지 등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곳에 살던 몽골인들의 생활 소품이 전시돼있다.
보수중인이슬람 사원은 마을의 기원과도 관계가 있다. 400여년 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근처의 몽골인들은 이슬람을 믿었는데 이들이 서부 시베리아에이슬람을 퍼뜨리기 위해 옮겨오면서 마을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현재 주민은 3,000여명인데 다른 민족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절반 가량만 몽골인이다.
하지만 마을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아지아프트나 관장은 “여러 민족이섞여있어도 그로 인한 갈등은 거의 없으며 서로들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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