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야 모두들 운을 잘도 타고나더라마는 나는 어떻게 점지된 인간인지 될 성 부른일도 판판이 깨지는, 팔자가 억세게 드센 살이를 해오고 있다.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문학의 길에 빠져든 탓인 듯 싶은데, 이런 청승맞은 생각이들면 문득 떠오르는 일. 진주중학교(그때는 6년제였다)에 다니던 1949년 국어 선생으로부터 들은 한 마디 ‘말씀’이다.
내일부터 여름방학에 들어간다는 날, 국어 선생이던 담임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다른 숙제는 안 해도 좋으니 시조를 많이 써오라” 고 했다.
될 성 부르지도 못한 것이 시집을 끼고다니던 무렵이라 선생께서 나의 문학열을 알아주심이라 지레짐작하고 뛸 듯이 기뻐했으니 사람이란 제 잘난 멋으로 산다 함은 이런 경우일 터.
방학이 되어 지금은 경남 진주시에 편입된 진양군 이천면 고향 집으로 내려가던길로 과수원 까마귀 보기를 자청해서 원두막에 붙박혀 시조 짓기로 방학을 때우고 나니 공책 한 권이 메꾸어지더라.
내가 봐도 여간 기특하지가 않아색연필로 ‘박용수 시조집’이라고 ‘장정(裝幀)’까지해서 선생께 바쳤던 것인데.
그런데 선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바야흐로 가을이겠다. 놀기에 바빠진 내가 ‘그따위 시조쯤이야’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날 다른 반에서 수업을 마치고 지나가던 선생이 “용수너 이놈 교무실로 좀 와!”했다.
비록 놀기를 일삼았지만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않은데 무슨 날벼락일까. 교무실로 가니 선생님은 뚱딴지같이 걸상에 앉으라며 빙글거린다.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 몰라 엉거주춤 앉는데 공책 한권을 홱 던진다.
“그거 어디서 베꼈냐?”
엉겁결에 받아 든 공책을 보니 ‘박용수시조집’이아닌가.
“제가 지은 건데요.”
“너가 지은 것이면 왜 우리말이 하나도 없노?”
하긴 그랬다. 어려운 한자를 많이 써야 배운 도리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라 옥편이며국어사전을 뒤적여 “▷▷하고△△하니 ▽▽하여라”식으로 찾아 쓴임자말은 모두 한자이고 우리말은 ‘하니’ , ‘하고’ 따위 토뿐이었으니 그렇긴 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나라가 있는 것은 나라말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어디 우리 말을 쓸 수 있더냐. 나라가 없으니 나라말도 못썼다. 이제 독립을 했으니 우리말을 살려 써야지. 안그래?”
그리고 평생 잊혀지지 않는 말씀 한 마디가 “나라말살려 쓰는 길이 문학의 길”이었으니 한글 연구라는 업보가 내 모가지에 대롱 매달린 빌미가 여기 있었으니 내 어찌 팔자타령을 삼가 하리요.
박용수·사단법인 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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