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조세형씨가 수감생활중 온몸을 던져 세상을 향해외치고 싶은 일이 있었다.엄상익 변호사가 그와의 면담을 근거로 98년 시사월간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청송교도소재소자 시절 조세형은 박영두라는 재소자가 아무 잘못 없이 교도관들에게 맞아죽은 일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탈주극까지 벌였다.
이 충격적인 사실이변호사 이름으로 고발되었지만, 세상은 그 일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범죄자의말이라고 믿고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글의 주인공인 조세형 석방 여부가 달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세속의 관심이 집중된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상은 엉뚱하게 밝혀졌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직권조사 결과 박영두의 사인이 교도관들의 집단폭행이었다는 사실이 지난 주 보도되었다.
엉뚱하다는 것은 살인자들과 그 조직원들의 조직적인 은폐공작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목격한 교도관이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17년 만에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제보를 했다는 점이다. 성공적으로 은폐했다고 믿었던 일도 그렇게 폭로될 수 있다는 좋은 사례다.
저 새끼들이 박영두 얼굴에타월을 뒤집어 씌우고 개 잡듯이 몽둥이로 두들겨 팼어. 박영두가 세번이나 기절을 했는데도 찬물을 끼얹어 가면서 패고 또 패고…
한 쪽에 나를 붙잡아 세워놓고… 나더러 똑똑히 보라 이거지, 나쁜 00들…> 엄 변호사 글에 나오는 목격자의 울부짖음이다.
84년 10월 13일의 일이다. 청송교도소의 한 말썽꾸러기 재소자는 교도관들이 자신을 겁주기 위해 비교적 양순한 동료를 불러내 의도적으로 그렇게한 것이라면서, 온 감방이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울었다.
그렇게 얻어맞은 박영두는 조세형의 옆방에 던져졌다. 처절하게 어머니를 부르며 살려달라고애원하는 울부짖음을 들으면서 “박영두가 죽어간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교도관은 엄살이라면서 들은 척도 않았다.
다음 날 새벽 피멍과 말라붙은 피로얼룩진 박영두의 시체가 교도관들에게 들려 나가는 장면이 조세형에게 목격되었다.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 조사기록에는 그때까지 손발이 결박된 상태였고,바지에 0이 묻어 있었으며,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문 채 죽어있었다고 적혀있다.
교도소측은 “기상시간에 박영두가 갑자기 쓰러져 의무과로 옮기는 중 숨졌다”고 속였다. 사인은 심장마비라 둘러댔다.
교도소측은 즉시 통영에 있는 가족에게 전보를 쳤지만, 다음날 형과 동생이 교도소로 달려갔을 때는 시체는 이미 매장된 뒤였다.
날씨가 더워 시신을오래 보관할 수 없었다는 것이 유가족 동의 없이 시신을 처리한 유일한 이유였다.
검찰 지휘로 의사의 검안과 부검절차까지 거쳤다던 그의 시체는,99년 유족이 이장할 때 관을 열어보니 양말을 신은 채 옆으로 누운 상태였다.
조사결과 그 때 박영두를 때려 죽인살인자 무리의 주동자는 그 뒤 암으로 죽었고, 한 사람은 과테말라로 이민을 갔다.
몇 사람은 퇴직했고, 한 사람은 아직 재직중이다. 이민자는 현지대사관을 통한 서면조사에서 폭행혐의를 부인했고, 퇴직자 한 사람은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묶은 사실까지는 시인했다. 교도소장 검안의사 등도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엄상익 변호사가 조세형 변론과정에서알게 된 이 사건을 문제 삼으려 했을 때 검찰과 법무부 고위 관계자들의 압력이 대단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는 검찰의 으름장에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학교 선배인 한 고위관리는 “1만 2,000명 교도관의 명예를 위해 덮어 달라”고 부탁했다.
언론도 사실을 부인하는법무부 측 보도자료를 근거로 기사를 쓰지 않았다. 아무 죄 없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청송교도소까지 넘어간 이름 없는 재소자의 기막힌 죽음 앞에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군가.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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