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1954년 6월9일창간한 후 늘 깨어있는 젊은 정신으로 한국사회를 바꾸고 언론의 역사에 남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해왔다. 한국일보가 우리 사회에 기여한 사업과 정착시킨제도를 되돌아본다. /편집자주1. 견습기자 선발제도
창간 한 달 만인 1954년7월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견습기자 선발시험을 제도화했다. 다른 언론사도 기자 공채시험을 일부 시행했지만 매년 일관된 원칙에 따라 기자를 공채함으로써언론인 선발의 전형을 제시한 것은 한국일보 뿐이었다.
첫해의 시험과목은 논문 시사상식 모의취재 영어 구두시험 등으로 지금과 비슷하다. 한국일보는 1기부터 62기까지지금까지 980여명의 기자를 배출했다. 한국일보가 기자사관학교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2.경부역전경주대회
1955년 11월 14일부산-서울 대역전경주대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경부역전경주대회는 황영조 이봉주 등 한국 마라톤의 기린아들을 배출한 한국마라톤의 산실. 부산에서 서울까지전장 490㎞구간을 7일간 매일 70~80km씩 강행군,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가진 선수를 가려내왔다.
지금의 명칭으로 바뀐 6회(60년)부터고등학생이 참가하는 시ㆍ도 대항전으로 치러지고 있다. 통일염원과 마라톤인재 양성이라는 대회 창설 정신은 신의주까지 달릴 그날까지 이어질 것이다.
3.미스코리아선발대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1957년 미국에서 개최되는 미스 유니버스대회에 파견할 한국대표를 선발하기 위해 그 해 5월 첫 대회를 열었다. 전후 어두운 한국의 이미지를 밝게바꿔보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59년에 선발된 오현주씨는 미스 유니버스대회에서 4개부문상을 수상, 기대에 부응했다.
한국일보는 80년에는 서울에서 미스유니버스대회를 개최했다. 미스코리아대회를 통해 87년 미스코리아 장윤정양이 88년 준 미스유니버스에 선발됐으며 수많은 대중스타가 탄생했다.내년부터는 ㈜일간스포츠가 개최한다.
4. 어린이 신문, 경제지, 스포츠지, 시사주간지, 재외동포지 개척
다양한 전문일간지의 시대 역시 한국일보가 열었다. 60년에 7월에 최초의 어린이신문인 소년한국일보가, 60년 8월에는 최초의 종합경제지인 서울경제신문이, 69년 9월에는 최초의 스포츠전문지인 일간스포츠가 창간됐다.
장기영 창간발행인은 54년 4월 국내 최초의 영자일간지인 코리아타임스(50년4월 창간)를 인수했으며 64년 9월 27일에는 최초의 시사주간지 주간한국을 창간했다. 또 재외동포를 위한 최초의 신문인 미주한국일보를 69년6월9일 창간했다.
5.10만 어린이 부모 찾아주기(1961~68) 1,000만 이산가족 ㆍ친지 찾기운동(74~76)
이산가족의 아픔은 한국일보가 창간 이래 관심을 두어온 화두. 56년 전쟁고아돕기 운동을 펼쳤던 한국일보사는 61년 1월1일신년호에 고아 63명의 사진과 인적사항을 게재하며 ‘10만 어린이 부모 찾아주기 운동’을시작했다.
68년까지 1만 2,671명의 전쟁고아와 부모들의 사진ㆍ인적사항을 게재한 결과 382명이 부모와 재회했다.이어 72년의 7ㆍ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74~76년 ‘1,000만 이산가족ㆍ친지 찾기 운동’을펼쳐 164건의 이산가족을 재회시켰다.
6. 황석영의 장길산 10년간 연재(1974~1984)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 명작인 ‘장길산’은 한국일보의 은근과 끈기가 작가와 함께 만들어낸 작품. 1974년 7월11일부터 84년 7월5일까지 무려 10년동안 2,092회를 연재,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며 완성됐다. 작가황석영씨가 기억하는 장기 휴재(休載)만 다섯 번이다.
‘장길산’은 봉건체제에 신음하는 민중의 삶을 통해 70~80년대의시대 상황을 그대로 투영한 작품이었다. “군사독재라는 시대적 배경, 한국일보라는 리버럴한 신문사가 아니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황씨는 회고한다.
7. 고상돈 에베레스트 등정 후원(77)
‘한국은드디어 세계의 정상에 섰다.” 1977년 9월17일자 신문은 한국일보ㆍ대한산악연맹이 공동주관한 에베레스트원정대(대장 김영도ㆍ金永棹)의 고상돈(高相敦ㆍ당시 나이 29세) 대원의 정상 등정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77년 9월 15일 낮12시 50분에한국은 세계 8번째 에베레스트 등정국이 되었고 몬순기간에 등정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한국일보가 74년 1월1일 사고로 ‘77년 에베레스트 정복’의지를 천명한 뒤 3년 9개월만이었다.
한국일보는 허영호(許永浩) 탐험대의 91년 북극점 정복, 94년 11월 남극점 정복도 후원해 한국인의 지구 3대 극지정복에 기여했다.
8. 전국동시인쇄시대 개막(91.8.21)
91년 11월 12일 경남 창원에 현지 공장을 완공하고 영호남지역에서도 서울과 같은 시간대에 만든 신문을 볼 수 있는 전국동시인쇄체제를 갖추었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원우현(元佑鉉) 교수는 이를 ‘지역 차별성과 뉴스의 시차를 완전극복한 쾌거’라고 평했다.
92년 6월에는 광주공장을 추가로 완성해 전국동시인쇄망을 갖추었다. 다른 신문들도 뒤따라왔음은 물론이다. 한국일보는또 93년 8월 CTS인쇄를 시작, 최초로 납활자시대를 끝내고 컴퓨터시대를 연 신문사이기도 하다.
9.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1990~94)
한국일보사는 90년 3월부터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함께 쌀풍작으로 남아도는 쌀을 독자들의 성금으로 사들여 영세민, 장애인, 결식아동,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전달하는 ‘사랑의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약 5년간 100만명 이상이 참여해 71억원 이상을 모금했다. 이 운동을통해 한국일보사는 방글라데시, 소말리아, 몽골 등 해외 적빈 지역에도 쌀을 전달했으며 90년 7월에는 북한에 1만 가마의 쌀을 전달해 90년대 남북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만들었다.
10.장명수 사장 한국 중앙 일간지 최초의 여자 사장 임명(1999.8)
1962년 여자 사진기자채용, 1975년 여기자만의 공채(견습 31기) 등 진보적인 여성정책을 펴왔던 한국일보는 99년 8월 장명수(張明秀) 당시 주필을 대표이사 사장에임명했다. 여성 사장 임명은 중앙 일간지 사상 최초로, 여성계는 물론 여야 각 정당이 공식 환영논평을 낼 정도였다.
63년 한국일보 공채 16기로입사한 장 사장은 82년 7월부터 ‘여기자 칼럼’을 시작해 현재까지 ‘장명수칼럼’으로 개칭 연재하고 있다. 중앙 일간지에서 주필을 여성이 맡은 것도 한국일보와 장명수 사장이 처음이었다.
■김주언 前본보기자 1986년 보도지침폭로
1986년 한국일보 편집부의 김주언(金周彦ㆍ47ㆍ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기자는 말지 1986년 9월호 특집에서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은 편집국장이나 데스크, 기자가 판단할 사건 취급 여부, 기사 방향, 기사 크기와 면 배치에 대한 ‘보도지침’을 매일 모든 언론사에 지시했다.
김주언씨는 85년 10월부터 86년 8월까지 각 언론사에 전달된 584개항의 보도지침을 복사해 말지를 발간하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에 건네주었고 말지는 이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말지 보도로 전두환 정부의 언론탄압은 국내외에 적나라하게 폭로됐고 정부는 지나친 언론간섭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주언씨는 “한국일보는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기관원 상주 및 편집권 침해 등과 관련해 83년부터 간헐적으로 성명을 발표해 오는 등 다른 언론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분위기였다”고당시를 전했다.
이 사건으로 김주언씨는 당시언협의 사무국장이었던 김태홍(金泰弘ㆍ 민주당 국회의원ㆍ59)씨, 실행위원 신홍범(愼洪範 ㆍ출판사 두레 대표ㆍ60)씨와 함께 이해 12월15일 구속됐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미국언론인보호위원회, 미국ㆍ캐나다신문협회, 김수환 추기경 등 나라 안팎에서 구속 언론인 석방 촉구가 줄을 이었고, 모두87년 6월3일 집행유예로풀려났다. 김주언씨는 88년 7월 서울경제 증권부로 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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