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란 확실히 보통의 선물은 아닙니다. 상을 준다는 것은 사회의 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을 특별히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정을 통하여 그 분야를 구성하는 공동의 가치를 확인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상을 주고 받는 제도를 운영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여하는 활동을 공동의 문화로 길러가고 그 활동의 표본이 되는 전통을 만들어갑니다.
팔봉비평문학상은 문학비평 분야에서 공동의 문화와 전통을 만들어온 주요 문학상 중 하나입니다.
고(故) 김현 선생을 시작으로 하는 역대수상자들은 문학적, 이념적 입장에서 많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문학비평의 창조적인 관행을 만드는 데에 저마다 빛나는 공헌을 하신 분들입니다.
저는 그 분들이 대표하는 비평의 문화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그 분들의 글을 읽으며 성장한 저 자신의 비평적 신원에 긍지를 느끼는 마음으로, 팔봉비평문학상을 받습니다.
팔봉김기진선생은 스물 한 살 때인 1923년 ‘프로므나드 상티망탈’이라는 수필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문학사에서 ‘경향문학’의 발흥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취급되곤 하는 이 글에는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상황과 대면한 젊은이의 울분과 정열이 뜨겁게 표출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화자는 그의 조국에서 ‘도깨비의 세상’, 즉 사람들이 모두 미망에 빠져 ‘송장’과 다름없이 존재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그 죽음의 상태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할 문학을 ‘생의 본연한 요구’라는 이름으로 촉구하고 있습니다.
청년기의 팔봉선생은 러시아 혁명이 당시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불러일으킨 급진적 변혁의 희망 속에서 사고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의 생각은 종전의 문학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생의 본연한 요구‘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문학을 기획하는 발상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팔봉선생에 앞서서 ‘신문학’을 자임한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 또는 ‘생명’을 근거로 하는 급진주의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광수가 1910년대에 전개한 반역적 담론의 요체였습니다.
이광수는 ‘생의 활동’이라는 베르그송적 관념을 가지고 삶의 모든 역사적 관습과의 결별을 꿈꾸었으며, 그러한 생각의 일환으로 근대적 문학 관념을 성립시켰습니다.
대범하게 말하면 한국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문학’은 ‘생’의 발견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한국문학에서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중요한 노력들은 ‘생’에 대한 참조를 반복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생은 모든 전통적 권위와 굳어진 관행들에 대한 도발을 정당화하는 무엇이면서 또한 언제나 새로운 정의와 해석을 허용하는 무엇입니다.
생의 요구를 대표하여 어떤 사람은 문명을, 어떤 사람은 민족을, 어떤 사람은 민중을, 어떤 사람은 여성을, 어떤 사람은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생을 어떻게 정의하고 재현하든 간에 그것은 잠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표상이 고정된 생, 법칙이 확정된 생, 경계가 정해진 생이란 이미 생이 아니고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생은 그것을 정확하게 재현할 언어를 요구하는 동시에 재현했다고 주장하는 언어를 넘어서도록 요구합니다.
생의 이념이 요청하는 언어는 생의 모든 발랄함, 활동성, 일탈성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그 살아 있는 언어, 언제나 스스로를 새롭게 만드는 언어를 가리켜 문학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제가 하는 비평이 그 생의 문학, 문학의 생을 건전하게 하는 데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황종연 동국대 국문과 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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