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서구에서도 유일하게 유혈혁명 없이 계층간 타협을 통한 민주적 변혁을 이뤘다. 그 역사적 증거 가운데 하나가 지금은 공공 소유인 옛 영주와 귀족들의 광대한 영지와 성이다.왕권마저 견제했던그들이 말을 타고 사냥개를 몰아 여우 사냥을 즐기던 장원은 야생공원으로, 권위를 상징하던 성은 대학 세미나 시설로 바뀌었다.
영국 지배층은 봉건 질서가 도전받던 전환기에 여러 특권을 포기하고 막대한 세습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
대신 시민 사회는 다른 나라와 달리 귀족 제도를 용인했다. 이 대타협으로고상한 신분을 유지한 귀족들은 세속의 돈벌이와 부의 축적을 삼간 채 기부와 봉사에 힘 쏟는다. 또 예외 없이 국방 의무를 다하고, 공직에도 오직봉사하기 위해 나간다.
우리가 늘 부러워하는 이 노블리스오블리제 전통은 그저 생긴 게 아니다. 시민의 의회는 귀족들의 세습 재산에 가혹한 세금을 부과, 명예로운 타협을 압박했다.
이기적 자본주의 사회의평화와 민주주의가 부자들의 도덕심에만 기초할 순 없는 것이다. 시민 혁명을 경험한 유럽 국가들이 사회주의적 평등 이념에 바탕 한 조세 제도를 갖춘것도 이런 맥락이다.
봉건적 굴레 없이 처음부터 시민이주도한 미국의 전통은 다르다. 그들도 독립과 함께 재산 상속세를 도입했고, 이것이 활발한 사회적 기부행위의 유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조세 제도를통한 부의 재분배는 유럽에 비해 미약하고, 따라서 부의 불균형이 심하다.
그나마 상속세도 시대에 따라 세율이크게 변동했고, 폐지한 적도 3차례나 있다. 한때 77% 에 이른 상속세율은 현재 최고 55%다.
그런데 ‘부자들의 자본주의’를 추구한다고 비난받는 부시 행정부는 다시 상속세 폐지에 나섰다. 지난달 의회를 통과한 감세법안은 상속세율을 최고 45%로 낮추고 면세점을 점차 높여, 2010년에는아예 폐지한다는 계획이다.
상속세 폐지는 갑부들이 죽기 전성경 가르침보다 세금을 고려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유인을 없앨 것이란 비판이 거세다.
미국에서 대학 등 비영리 단체에 대한 기부금은 한 해2,000억 달러가 넘는다. 그런데 기부 금액은 부자들이 많지만, 소득에 따른 기부율은 저소득층이 더 높다.
연 소득 100만 달러가 넘는 부자들은기부 여력의 고작 10% 정도를 내고 있어, 부를 계속 축적하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속세마저 없애면 갑부의 자녀들만 살찌는 귀족 사회가 될 것이란 우려가 높은 것이다.
선진 사회의 기부 전통과 조세 제도를언급한 이유는 우리의 대학 기여입학제 발상이 사회적 기부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부자들에게 가혹할 정도의 조세 징수를통해 대학 교육까지 무상으로 베푸는 유럽 대륙식은 꿈도 못 꾸고, 미국처럼 가진 자의 선의에 의존하기엔 기부 문화 자체가 척박하다.
그러나 수십억을내고 입학 특전을 사는 것은 사회에서 얻은 것을 되돌려 건강한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려는 서구의 기부 전통과는 근본이 다르다. 돈으로 다시 사회적 이익을 얻는 천민 자본주의적 측면이 두드러지는것이다.
기여 입학제는 미국 대학을 선례삼지만, 그들은 여러 대에 걸친 기여자의 후손에게 특혜를 준다. 돈과 자녀 입학을 맞바꾸지는 않는 것이다.
전통과 명예를 자랑하는 대학이 설립자와석학 등 헌신적 유공자와 20억 단발 기부자를 동급으로 예우하려는 것은 아연할 노릇이다.
달리 대안이 없는 듯한 현실을 탓할지모른다. 그러나 서구와 미국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는 올바른 대안은 분명 있다고 본다.
그 대안 찾기는 사회와 국가의 장래가 걸린 대학 교육은사회 전체가 부담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유럽이 대학 교육을 무상으로 하는 것은 계층간 불균형이 세습화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건전한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긴요한 그 교훈을 외면한 채, 졸부까지 끼어 들 대가성 기여 입학제에 대학의 장래를 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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