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의는 발이 생명이다. 한쪽 다리가 부러지면 다른 다리로 달리고, 두 다리가 다 부러지면 손으로 달리고, 죽기 살기로 달리고 죽을 때까지 달려야한다.”1945년 6월일본의 작은 어촌, 개업의 아카기(이모토 아키라)는 “간염이군. 간염이야”라고 외치면서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녀 별명이 ‘간장(肝臟)선생’이다. 흰색 양복에 백구두, 그리고 나비 넥타이에 중절모로 모양을 낸 간장 선생은 외양부터 범상치 않다. 이 ‘모던’ 한 모습의 의사는 전쟁으로 사람들이 턱턱 죽어가는 와중에서 ‘간염 박멸’을 외쳐댄다. 그립고 그리웠던 아들의 전사소식을 접하고도 그의 열망은 식지 않는다.
그의 주변에는 모두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 뿐이다. 창녀 출신의 간호사 소노코(아소구미코), 술에 절어 창녀와 살고 있는 승려 우메모토(카라 주로), 실력을 갖춘 외과의지만 몰핀이 없으면 제정신이 아닌 토리우미까지. 아카기의‘간염 박멸’ 의지를 뒷받침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비정상이다. 백전노장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미친 전쟁’의 시대에 비정상의 캐릭터를 통해 ‘시대의제정신’을 말한다. ‘해독의 장기’ 인 간장이 제 역할을 못하는 세상은 오히려 비정상인들의 ‘인간애’를 통해 정화된다는 논리이다.
전쟁과 군인에 대한 조롱은 노회하다. “아니자네 세탁소 주인 아닌가, 그 옷은 뭔가.” “이래야 뭔가 그럴듯 하잖아요.” 주민들의 전시훈련을 감시하는 세탁소 주인은 손님이 맡긴 군인 장교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제복이 갖는 우매한 힘에 대한 조롱이다.‘간염 퇴치’에 대한 아카기의 열망이 ‘광기’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를 제정신 들게 한 것은 바닷속 커다란 고래였다. 적을 숨겨준 것이 들통나 병원이 엉망이 되고, 낙담한 아카기는 마침내 “생체실험까지 한다”는 만주 전선으로 자원하겠다며 난리를 피운다. 비를 뚫고 외딴 섬 왕진을 가서 환자의 임종을 마친 그는 돌아오는 길에 큰 고래를 본다. 자유롭게 물속에서 노니는 푸른고래. “선생님에게만은 공짜로 자 주겠다”는 천진한 소녀와 의사는 멀리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저건 아마 간염을 앓다 죽은 사람들의 원혼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말한다.
<간장 선생> 은 이마무라 감독나이 72세인 1998년 작으로 그 해 칸 영화제에 초청됐다. 관능의 에너지가 소름돋게 만드는 <나라야마부시코> (1983), 비루한 소시민의 삶을 맛보게 하는 <우나기> (1997) 등 두 편의 황금종려상 수상작과 비교하면 확실히 ‘세월’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영화이다. 정서적 파장에 있어서는 전작에 못 미치지만 관객이 보기에는 훨씬 편안해졌다. 감독 스스로도말한 적이 있다. “관객을 숨쉬게 해 줄 영화를 찍고 싶었다.” 우나기> 나라야마부시코> 간장>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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