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이었다. 중국음식점에서 가진 조촐한 아버지 회갑잔치. 그 기쁜 자리에서 어머니는 노래를 불렀다.처음으로 기억되는 어머니의 노래. 슬픔 같기도 하고 아쉬움 같기도 하고.오랜 시간 같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느낌도 묻어있는 듯했다. 느리게 ‘봄날은 간다’ 를 부르는 어머니는 노랫말처럼 ‘연분홍 치마’ 를 입고 있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가 끝나고 “어떤영화를 할까” 생각하던 허진호(38) 감독은 그때의 짧은 기억을 떠올렸다.
한낱 지나간 유행가에 지나간기억에 불과하지만 ‘봄날은 간다’ 로 그는 여러 생각을할 수 있었다. “시간은 늘 가고, 그 시간 속에서 모든 것들이 변한다.
서로 만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잊혀졌다 다시 기억하고. 그 기억이 갖는 느낌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의 영화는 그 변화와 기억에관한 관찰이다. 허진호는 가수 김광석의 영정을 보고 죽음조차 맑은 수재화처럼 담은, 그래서 더욱 슬픈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들었고, 어머니의 노랫소리를 떠올려 ‘봄날은간다’를 시작했다.
이번에 기억을 붙잡는 것은 ‘사진’ 이 아닌 ‘소리’이다. 지방방송국 아나운서 은수(이영애)와 사운드 엔지니어상우(유지태)가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면서 겪는 사랑과 이별과 아픔.
사랑의 상처가 있는 여자는 사랑으로부터 멀리 있으려 하고,잊혀지지 않는 ‘봄날’처럼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남자는 열병에 빠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랑의 기억은 점점 멀어져 간다.
“큰의미를 갖고 소리를 소재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믹싱을 하면서 작은 소리가 주는 느낌이 중요하다고생각했다.
바람소리, 빗소리,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 등 문득 계절이 바뀔 때 나는 소리들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해서 주인공들의 소리 채집으로출발했다. 소리를 담는 과정에서 함께 담을 영상의 서정성도 생각했다.”
2월25일 촬영을 시작하면서허 감독은 영상과 소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강원도 삼척으로 정선으로, 전남 강진으로.
대나무 숲이 흔들리는 소리는 다행히 바람이힘차게 불어 쉽게 담았지만, 풍경소리는 오히려 바람 때문에 소리가 너무 커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소리는 마음을 열고가만히 있어야 들린다. 그 소리를 찾고 같이 들으면서 계절과 장소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듯 사람의 마음도, 기억도조금씩 변해 간다. ”
이런 것들을 그는 조용히 카메라를고정시키고 응시한다. 그래서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의 죽음조차 화사한 개나리가 핀 봄날로 기억케 해 우리를 슬프게 만들고,미소에서 오히려 죽음을 앞둔 자의 절망을 발견하게 한다.
그 ‘자연스러운 개인의 정서’야말로작은 이야기의 허준호 영화가 일본과 홍콩에서도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일부러 감정을 억제하는것은 아니다.
의도적인 것을 싫어할 뿐이다. 영화를 통해 영화를 배우지 않아 장르적이거나 영화적인 것은 몰라서 못한다.”
대학(연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그는 ‘절대적인 것들을 부정’하는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했다.
시간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변화를 인간의 감성으로 끌어들여 그는 또 한편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기억하기’ 가 아니라 ‘지우기’이다. “그런 내 영화를보면서 자그마한 기억이라도 건져올리길 바란다. ‘여운’이남았으면 한다.”
■한국·일본·홍콩 공동투자
우노필름이 순제작비 18억원을 들여 제작중인 ‘봄날은간다’는 한국(싸이더스 45%)과 일본(쇼지쿠40%)과 홍콩(어플로즈 픽쳐스 15%)이 공동 투자했다.
이미 사전 기획단계에서 3국 투자가 결정됐다. 무엇보다 일본과 홍콩에서 호평을 받은 ‘8월의 크리스마스’ 의 허진호 감독 영화라는 점 때문이다.
5일 웨스틴조선 호텔에서 열린 제작 중간발표회를 겸한 투자조인식에서 쇼지쿠(松竹)의 오타니 노부요시(大谷信義) 대표는 “허진호감독에 이영애 유지태 주연이라면 투자금 회수는 걱정하지 않는다.
‘쉬리’ 이후 일본도 한국영화에 주목하고 있다. 이번 투자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업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고했다.
‘첨밀밀’로 유명해진 어플로즈픽쳐스의 알란 평 대표도 “허진호 감독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만들어온 영화 기준과도맞다”고 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까지 ‘One Fine Spring Day’로 정해준 그는 “아시아 영화의 르네상스란 바로 이런 크로스오버를 통해시장을 넓히는 일”이라고 했다.
싸이더스 김형순 대표는 “이제 국내시장만으로영화를 만드는 것은 위험하다”며 “ 단순한 한국영화의 수출이 아니라 공동투자(‘봄날은간다’)나 공동제작( ‘밤을 걸고’), 한국영화의 아시아화( ‘무사’)로 해외 배급망 확보와 국제화를 추진해 리스크를 줄이는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70%가량 촬영이 진행된 ‘봄날은 간다’ 는 올 추석 국내개봉이 끝나면 홍콩 및 동아시아 지역은 어플로스 픽쳐스가, 일본 및 나머지 해외는 쇼지쿠가 배급을 맡는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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