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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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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입력
2001.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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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6월6일, 미국 아이젠하워 대장의총 지휘 아래 미국 제1군, 영국 제2군, 캐나다 제1군을 주축으로 삼은 연합군이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했다.이 날 수송기 2,316대와수많은 글라이더로 공수부대를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프랑스 내륙에 거점을 확보한 연합군은, 그와 거의 동시에 항공기 총 1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해 노르망디 해안을 초토화하면서 7개 사단을 상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상 최대의 작전’이나‘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영화에는 상륙 첫날의 피흘림이 참혹하게 묘사돼 있다. 이 날부터 7월2일까지 연합국측은 인원 약 100만명, 물자 약 57만톤, 각종차량 17만 량을 프랑스에 상륙시켰다.

상륙 이후 첫 3주동안 연합군의 손실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1,796명에 이르렀고,작전 수행 과정에서 독일군 약 41,000명을 사로잡았다. 전쟁 초기 서부 전선에서 순식간에 패배해 유럽 대륙으로부터 퇴각한 연합국측은 이 작전을 통해 비로소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41년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급습한 이래 독일군의 주력부대를 맞아 힘겨운 싸움을 감당하던 소련은 개전 초기부터 영국과 미국 양측에 대해서 북프랑스에 제2전선을 구축해줄 것을 되풀이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측의 신중론에 미국이 동조하면서 작전의 실행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1943년 11월 말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 등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들은 테헤란에서 회담을 갖고 1944년 5월1일 이전에 북프랑스에서 상륙 작전을 실행할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이 작전이 시작된 것은 그 최종 시한을 한 달 남짓넘긴 57년 전 오늘이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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