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봄, 여의도광장에서 ‘국풍 81’이라는 관제 문화행사가 열린 적이 있다. 외관상 행사의 주최자는 KBS였으나 막후에는 당시 청와대 실세 비서관이던 허문도씨가 있었다.나는 TBC 프로듀서로 근무하다 군부정권의 방송국 통폐합조치로 80년 말 갑자기 KBS로 이적,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81년 초 어느날, 기획조정실장이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그는 나를 보자 자신이 나를 잘 알고있는 선배임을 자칭하면서 어떤 제안을 해왔다.
5공화국 출범을 기념해 국민대화합을 위한 ‘국풍’이라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날더러 책임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행사만 잘 끝내면 내가 원하는 자리로 승진시켜 보내주겠다는 회유의 말도 잊지않고 흘렸다.
나는 그의 제안을 가능한 한 모나지 않게 회피할 생각이었으나 미처 거절 못 한 상태에서 그에게 끌려 청와대에 불려가 허씨와 대면했다.
허씨는 연신 걸려오는 전화를 양 손에 들고 바쁘게 통화하다 틈을 내 국풍 추진과 관련한 보고를 받았다.
그들의 대화에서 그들이 국풍이라는 관제호국행사에 김지하시인과 김민기, 그리고 나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느꼈다. 원주에 가서 김지하시인을 만나 생각을 들어두었고 익산에서 농사짓던 김민기를 찾아가 정황을 확인했다.
그리고 백기완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그 무렵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받은 후유증으로 1년 넘게 혼수상태에 빠져있었음에도 자초지종을 들으시더니 고함을 버럭 지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택아, 넌 이제 기회를 만난 거야. 당장 그만 두라구. 넌 이제 진짜 굿쟁이 길로 나가야 돼.” 나는 혼수상태에서도 전혀 흐트러지지않는 선생님의 기개에 완전히 감동되었다.
며칠 후 다시 청와대로 끌려갔다. 허씨는 여전히 양 손과 양 어깨에 전화를 들고 바쁘게 통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뜻밖에도 전국탈패연합의 중심에 있는 대학생 대표 두 명이 와있었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후배들로부터 결정적인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기회를 포착해야만 했다. 마침 허씨가 전화통을 턱으로 쥐고 통화를 하다 나를 힐끗 보더니 예사롭게 협조를 지시하려 들었다.
나는 이때다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다. “저는 이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 방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놀라 나를 쳐다보면서 일순간 스톱모션이 되었다.
나는 살벌한 정국에서 한달간 시골로 피신했다가 결국 사표를 제출하고 야인의 길, 광대의 길로 나서게 된다.
임진택·연출가·판소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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