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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면서] 숭늉맛 같은 한국인의 수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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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면서] 숭늉맛 같은 한국인의 수줍음

입력
2001.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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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정이 많고 사랑이 많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아서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 그걸 처음 느끼게 된 것은 몇 년 전이었다.중국에서 한국어과를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날 시청각 수업 때 선생님이 ‘나의 사랑 나의 신부’란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평범하지만 따뜻한 사랑 이야기였다. 아내가 챙겨준 도시락 속에의 완두콩으로 만든 하트 모양을 보고 남자가 동료들이 볼까 감추는 장면, 손님들이 간 후 아내한테 “사랑한다”고 창문에다 쓰는 장면을 보고 한국 사람이 정말 사랑을 표현하는데 수줍음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한국 사람들은 부부 사이에 쉽게 사랑한다고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을 창문에조차 쓰지 못하는 것 같다.

중국 사람은 배우자를 얘기할 때 “내 애인(愛人)”이라고 하는데 한국 남자들은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 “우리 집사람”, “우리 마누라”라고 표현한다.

일견 자기 아내를 무시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지갑 속에서 항상 아내와 아이들의 사진이 숨겨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수줍어서 사랑 이야기를 못한다는 것을 나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랑을 욕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자식, 새끼, 놈처럼 TV에서 깡패들이 싸울 때나 하는 욕을 한국인들은 친한 표시로 쓰기도 한다.

우리 연구소의 선배 언니는 자기 남자 친구를 ‘원수’라고 하는데 그 표정은 그렇게 달콤할 수 없다.

아버지는 자랑스런 눈빛으로 아들을 보면서 “이 자식 ”이라고 하고 할머니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새끼”라고 한다.

한국인의 수줍음 때문에 당황하기도 했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짐이 몹시 많았다. 공항 버스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큰 짐 두 개를 들고 있어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버스 문이 열리는 순간 내 짐 하나가 옆 할아버지 손에 들어가 있었다. 너무 고마워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는데 할아버지는 아무 표정 없이 머리만 끄떡이셨다. 내가 뭘 잘못해서 할아버지가 화가 나셨는지 내내 불안해했던 것 같다.

또얼마 전에 책상 하나를 들고 집에 가는데 동네에서 쓰레기를 수집하는 아저씨가 “학생, 내 오토바이를 타”라고 했다.

오토바이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라서 “탈 수 있을까요?”라고 조심스럽게 여쭤봤는데 아저씨가 “그래, 타라니까”하고 약간 짜증난 목소리로 말하시는 것이었다. 숨을 죽여 얼른 탔는데 아저씨는 책상을 내가 사는 옥탑방까지 들어주셨다. “고맙습니다”라는 내 인사에 아저씨는 투박하게 “그래”라고 한 마디만 하고 가버리셨다.

여기서 갑자기 숭늉이 생각난다. 커피는 향기가 좋은데 숭늉은 향기가 없다. 하지만 숭늉이 입에 들어갈 때의 고소함은 커피가 흉내낼 수 없다. 한국 사람의 수줍음 많고 순박한 마음은 숭늉 맛에 비유하면 적당할 것 같다.

왕샤오링ㆍ경희대 사회학과 대학원ㆍ석사과정ㆍ중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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